나에게 영어는, 뭐랄까, 극복해야 할 하나의 과제 같은 것이었다. 애초부터 겁을 내고 있었으니, 1년쯤, 영어를 써야 하는 환경에서 살아내야 했던 과거의 한 시점은 ‘영어로 인해 부대꼈지만 넘어서지는 못한’ 기억으로 남았고, 덕분에 기존의 관념은 더 강화되는 쪽으로 흘렀다. 아이를 낳고 육아에 전념하면서는 영어능력이 요구되는 환경에 처할 일이 없었으므로 과제를 꼭 이어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감독관도 제한시간도 없는 시험장에서 하나 둘 완성된 시험지를 척척 제출하고 나갈 때, 나는 여전히 거기에 남아서 풀다 만 시험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께름칙함은 늘 안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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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관련해서는 끔찍한 기억부터, 덜 안 좋은 기억, 썩 괜찮은 기억, 꽤 자부심을 갖는 기억에 이르기까지, 의식과 무의식에 걸쳐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누적되었겠지만, 야속하게도 나의 뇌는 한 장면을 뜬금없이, 하지만 지난하게 떠올려주었다. 그 기억은 내가 오랜 시간 ‘치부’라고 써두고 들춰도 보기 싫어했던 것으로, 내가 영어를 ‘극복’이라는 단어와 연결 짓게 된 시작점과 무관하지 않다. 마뜩잖게도 덩그러니 남아버린, 미처 꿰지 못한 단추 하나를 쥐고 잘못 꿴 단춧구멍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기억이 턱 하니 (구멍은 구멍인데) 목구멍에 걸려있었다. 눈감아버린 채 빼내지 않으면, 어떤 산해진미가 차려진들 제대로 삼키지 못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이십대 중반, 첫 직장을 그만 두고 새로운 업종에서의 두 번째 시작을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출판사였고, 나의 이전 경력을 좋게 보았는지 서류전형을 거쳐 구두면접도 무난하게 치러지는 중이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엔딩을 목전에 두었을 즈음, 면접관은 영문페이퍼 하나와 두터운 영한사전을 내밀더니, 할 수 있는 만큼 번역을 한 후 내주시면 된다고, 부탁으로 착각할 정도로 굉장히 예의바르게 요청 같은 지시를 하고 사라졌다.
수능 외국어영역은 감으로 풀었고 대학시절 영어 과목은 눈치로 넘어갔는데, 아 이런, 답을 골라내라는 오지선다형도 아니고, 뭘 하라고??? 온몸으로 당황한 나는 얼굴이 발개진 채 나갈까 말까를 고르는 데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마치 영한사전이 신문물이라도 되는 냥 사전도, 나의 뇌도, 그저 무용하기만 했다. 그냥 나가서 ‘도망자’로 한바탕 우스갯거리가 되는 게 덜 창피할지, 그냥 남아서 ‘무식자’로의 낯짝을 푹 숙이고 앉아있는 게 덜 창피할지 가늠하다가, 고심 끝에 전자를 택했고, 신의 가호로 나는, 단 한 명도 마주치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정말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부끄러운 비밀이다. 온갖 성취의 기억들을 그러모아 몇 백 겹으로 덮고 덮으면서, 제일 밑에 깔려있는 그것은 언제라도 다시는 볼 일이 없게끔, 내면의 아즈카반 독방에 가두어버린 기억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는 한 아무도 알 일이 없고, 안다한들 남들에겐 그다지 대수롭지 않을 것이긴 했다. 하지만 치부란 게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지극히 개인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지극히 개인적인 부끄러움. 그래서인가? 나의 오랜 치부는, 지극히 개인적인 순간에, 지극히 개인적인 방법으로, 극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