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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Aug 20. 2020

3인분의 고마움

2020년 8월 어느 여름 밤에

회사에서 집으로 가는 여러 방법 중 2020년 8월 12일, 그 날은 버스가 끌렸다. 가끔 버스로 귀가할 때면 이용하던 정류장이 아닌 다른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책을 읽다가 버스를 두세 정거장쯤 지나 내렸다. 낯설었지만 아예 모르는 동네는 아니었다. 지도를 검색하지 않아도 대충 이 방향으로 가면 집이 나온다는 것 정도는 아는.


조금이라도 익숙한 대로변을 따르지 않고 살짝 비껴서, 차 정도는 지날 수 있는 골목길을 걸었다. 여기는 이런 집이 있네, 이런 가게가 있네. 보이는 것을 보았다. 한 걸음에서 다음 걸음을 디뎠다. 걷는 나에게는 큰 예외 없이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고는 했다. 여유를 구할 수 있는 걷기란, 사건이 아니었다. 일상이었고, 또한 일상이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집이 다 왔음을 알리는 군자역 출구 앞에 도착했다. 신호등을 건널까, 지하로 건널까 잠시 망설이다 지하로 건너기로 하고 뒤를 돌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의 지팡이를 땅이나 공사장 벽을 향해 움직였고, 움직임은 이따금 허공을 향했다. ‘향했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 거기에 땅이 있는지, 공사장 벽이 있는지, 허공인지를 알고서 만들어낸 움직임이 아니었으니까.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한’ 움직임에는 어떤 단어를 빗댈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 사람의 움직임을 그 사람에게서 두 걸음쯤 떨어져 보고 있었다. 예전 경험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사에는 안마를 하는 시각 장애인들이 있다. 나 같은 직원이 미리 예약을 하면 그들에게서 1시간 동안 안마를 받을 수 있고, 그들 노동의 대가는 1만원. 그래서 회사 안을 그냥 지나다가도 시각 장애인을 마주할 기회가 종종 있다. 어느 날은 한 시각 장애인이 화장실로 가는 길을 헤매고 있었고 그 사람의 팔을 살짝 잡고 “도와드릴게요. 이쪽으로 가시면 돼요”라고 말했다. 도와준다는 뜻이었지만 이내 후회했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거나 허락을 구하지 않은 채 한 사람의 신체에 손을 대었으니까. 도와주려는 마음이 선의였더라도, 그 사람이 위협을 느낄 만큼 강하게 손을 얹은 게 아니었더라도 내 후회가 숨겨지지는 않았다. 다음에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한 순간이 있었기에 군자역 한 출구 앞에서 잠시, 그 생각을 데려오는 순간 또한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군자역으로 들어가려는 듯한데 그러지 못하고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딛는 그 사람을 나만 보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전거를 타던 한 사람이 그 사람에게로 가서 물었다.      


“어디로 가세요?”

“군자역으로 가려고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타던 자전거를 잠시 세우는 2초가량을 지나 그는 헤매는 상대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고맙습니다.”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요, 조심하세요.”      

상대가 천천히 두 개의 계단을 오를 때까지 지켜보던 이는 쉽게 뒤돌지 못했다.


“제가 봐드릴게요.”

나는 그들 사이에 소리를 얹었다.

“고맙습니다.”

쉽게 뒤돌지 못했던 이가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그는 무엇이 고마웠던 걸까. 그 사람도 몇 분 전의 나처럼 아마도 잠시, 생각했을 것이다. 조금 더 같이 가면서 길을 봐줘야 할까, 가는 방향이 다른데 어쩌지. ‘그냥 가도 괜찮을지’를 생각했을 테고, 그냥 가도 괜찮을지 아닐지에서 '무엇이'에는 자신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냥 가면 어딘지 마음이 안 편한 자신.

     

나는 그 사람을 그냥 가도 괜찮게 만든 사람이었고, 그래서 고마운 사람이 될 수 있었나보다.      


조금씩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 곁에서 다시, 두 걸음쯤 떨어져 나도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의 나의 걸음은 버스를 잘못 내린 뒤 군자역까지 오던 걸음의 속도보다 두 배 반쯤은 느렸다. 한낮의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속도보다 이미 충분히 느려졌다고 생각했던 그 걸음보다 느린 걸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느려진 걸음이 아니라 ‘원래의’ 속도였을 어떤 걸음.     


계단이 언제까지 이어지고 평지는 언제 나타나며 다시 계단은 언제까지 이어지는지를 모르는 채 딛는 한 걸음에는 망설임과 멈춤이 뭉쳐질 것이고 다음 걸음에는 생각이 섞여들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그런 걸 모르고도 이제껏 살아서 미안하다고 말하기란 염치없는 일, 이제라도 되짚어 보게 해주어 고맙다고 말하기란 물색없는 일.     


계단을 다 내려와 지하철 역사에 도착했을 때, 또 한번, 잠시 지켜보다 나는 물었다.      


“몇 호선으로 가세요?”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이 방향 맞죠?”      


군자역을 평소 이용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계단을 다 내려와 어느 방향으로 몸을 틀면 엘리베이터가 나오는지를 아는.      


“오른쪽 대각선으로 살짝만 몸 트시면 돼요.”

“아, 네네. 고맙습니다.”

“왼쪽에 바로 엘리베이터 있어요.”

오른쪽으로 살짝, 다시 왼쪽으로 살짝. “여기죠?”

“네, 지금 문 열렸어요.”

“아유, 고맙습니다.”      


다시 그 사람의 지팡이가 문에 닿았고, 나는 나의 ‘원래의’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2020년 8월 12일. 혹시 이런 상황을 내가 마주할 것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고 어쩌면 이런 상황에 닿기 위해 이전의 내 모든 선택들이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내가 버스를 타고 싶었던 것, 내가 한 버스를 더 앞서거나 늦추지 않고 딱 그 버스를 탄 것, 잘못 내린 것, 그래서 걸은 것. 내 걸음의 속도가, 걸음과 함께 발맞추던 마음의 속도가 오늘은 딱 그 사람과의 만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만큼 흘러갔던 것. 이 모든 게 알 수 없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어 있던 것일지 모른다는.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속 아이처럼 ‘착하게’ 행동한 나 자신이 기특하다고 뿌듯하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고, 이 세상이 그래도 아직 살 만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 어디쯤에는 ‘3인분의 고마움’이 있을 뿐이다. 세 사람이 말하고 듣고 전하고 받고, 그렇게 이 세상에 나게 한 3인분의 고마움이 있다.      


알 수 없게 흘러가는 하루에서 이 3인분의 고마움이 어떻게 흘러 어디에 닿아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는 또한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들이 이토록 많다. 다만 기대하는 밤이다. 3인분의 고마움이 세상을 휘휘 흘러가다 때로 긁히고 파이고 주저앉더라도 회복하기를, 마침내 다시 일어서보기를. 그렇게 자라서 지금보다 더 크고 넓은 고마움이 된다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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