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거리는, 있는 힘껏 불어오는 봄바람에
비망록(備忘錄) : [명사] 잊지 않으려고 중요한 골자를 적어둔 것. 또는 그런 책자
아버지는 매일 일기를 쓰셨다. 기억에도 없던 아주 어린 시절을 지나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무렵, 나 또한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담임선생님께 일기 과제를 받게 되었다. 그의 어깨너머로 항상 봐왔던 모습을 나는 어렵지 않게 곧잘 따라 했다.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 하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써오던 일기장을 자발적으로 펼쳤던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들어가며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눈에 띄게 늘어갔다. 쉴 틈 없이 이어지던 학교 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룸메이트 친구들과는 좁은 방에 둘러앉아 한참 동안 고된 수험생의 고민들로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그러다 고요한 밤이 찾아오면, 주황빛의 포근했던 스탠드 아래 일기를 쓰고 살며시 갈피를 꽂아두었다.
열일곱 소년이 기록했던 당시 일기장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학기마다 성적순으로 기숙사생을 새로 뽑았기에 매달 치르는 모의고사 성적이 잘 나오길 바라던 희망,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며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같은 반에 배정되기를 바라던 설렘, 2주에 한 번 먹을 수 있던 따스한 집 밥에 대한 그리움 등 지극히도 평범한 기록이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무엇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순수한 긍정의 가능성을 쫓고 있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수험 생활을 마치고 우리는 3년간의 정든 기숙사를 떠났다. 흩날리는 벚꽃 잎을 머리 위로 맞으며 저마다 꿈꾸던 대학의 캠퍼스에 발을 내디뎠고, 나의 일기장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은 고민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일기장 속 유일한 주인공이자 화자였던 나는 더 이상 꿈에 취해있는, 어리광 부리는 열일곱 소년이 아니었다. 소년을 둘러싼 우주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져갔다. 그와 함께 확장된 인간관계에서는 그저 ‘친구’가 아닌 ‘선배와 후배 아니면 동기’라는 명확한 이름표가 붙었다. 타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태생적인 한계로부터 오는 지독한 외로움과 방황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삶과 존재의 이유를 찾아가는 고독한 여정의 시작임을 요란하게 알렸다. 취업이라는 세상의 높은 벽에도 본격적으로 실감하며 ‘죄송하게도 이번에는 저희와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문구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했던 희망은 어린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내가 가능성이라는 별의 밝은 면을 기록했다면 오늘의 나는 그것의 어두운 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으면 좋겠네.’보다는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자조 섞인 탄식과 함께 무기력한 한숨을 뱉어냈다.
또 한 번의 실패를 경험했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의 하루에 내렸던 소나기는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태풍인가 하고 힘없이 체념해버렸다. 뜨거운 여름밤은 소리없이 깊어 가는데 쉽게 잠들지 못해 천장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일기장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손을 뻗어 조심스레 펼쳐냈다.
색이 조금 바랐던 낡은 그것엔 매일 밤 쓰인 수많은 다짐들이, 아무런 말도 없이 반짝이던 밤하늘의 별처럼 알알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 현실의 높은 벽과 끊임없는 타자와의 갈등, 오해, 방황 속에서도 과거의 나는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의 꿈은 동화 속 마법처럼 멋지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나와 네가 다름에도 우리는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있었으며 울고, 웃고, 다투지만 또 화해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과거의 다짐들은 오늘의 내가 바로 서 있을 수 있었던 명징한 까닭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또 다른 내일이 있음을 잊지 않으려는 나의 비망록(備忘錄)에 담겨있었다.
미국의 작가 켄 윌버는 ‘쓰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자기 안의 표현 도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돌아보면 단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바로 어제가 아련하고 아득하게 느껴졌던 적이 한 번쯤 있으리라.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도 우리의 하루는 다르게 적힌다. 이러한 생경함이 느껴질수록 순간의 감정과 흔적들이 그저 휩쓸려가지 않게 소중히 새겨두었다. 그렇게 나는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를 온전히 지켜내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우리의 봄(春). 꽃들이 앞다투어 수줍게 땅을 헤집고 나오는 계절. 조금은 더디게 오는 햇살을 받으며 오늘도 지친 하루 끝에 일기를 꾹꾹 적어냈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꽃 갈피를 조심스레 꽂아두었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내가 또다시 찾아오면 이 말은 꼭 전해주고 싶어서. 추운 겨울이 지나면 이렇게 예쁜 꽃이 활짝 피어날 거라고. 아름드리 꽃길과 따스한 햇살, 포근한 봄바람이 불어올 거라고 알려줘야지. 그러니 오늘 하루도 아낌없이 잘 살아봐야 한다고. 바닥에 떨어져도 다시 튀어 오르는, 결코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오늘도 내게 찾아온 고마운 하루를 잊지 않으려 새겨 놓은 비망록(備忘錄). 나의 노력과 감정, 주위의 사랑과 살아냄이 쌓여있는 위대한 흔적들. 내일의 내가 의심할 여지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아주 높은 가능성을 말해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가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