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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Mar 20. 2021

어쩌다 여행

여의도의 빌딩 숲 한가운데로 매일 지하철 출퇴근길을 뚫어내며 최근 몇 개월을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리고 올해도 계절을 돌아 찾아온 할머니의 제사. 집에서 몸 편히 쉴 수 있었지만 올해는 뭔가 내려가고 싶었다. 마침 반가운 봄비가 내렸고, 나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었던 뿌리 깊은 그녀에게 출발했다.


돌아오고 떠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묘한 감정으로 한데 얽히는 커다란 터미널의 대합실. 알 수 없는 까닭이었지만 정말 반가웠다.


처음 눈에 들어온 이들은 몹시도 아쉬워하며 이별하는 연인이었다. 누가 보아도 남자가 떠나는 듯했다. 여자분이 자꾸 그를 따라다니며, 붙잡는 듯했으니! 두 사람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 오늘 아주 잠시 헤어지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기분 좋은 의문점들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두 번째 마주한 풍경은 터미널 근처 포장마차였다. 가볍게 허기를 달래러 들어간 곳이었다. 내 행색을 보아하니, 먼 길 떠나는 나그네처럼 보였나 보다. 학생 때 300원, 500원으로도 충분히 채울 수 있었던 접시는 볼 수 없었다. 이 작은 떡볶이와 어묵들도 저마다의 가치를 서너 배는 거뜬히 올렸건만, 나는 그 시절보다 얼마만큼 자라났을는지.


버스 시간부터 자연스레 물어보시는 사장님과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힘든 하루하루지만 그래도 잘 될 거라고 말하던 사장님을 뒤로 한채 플랫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버스에 올라타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풍경은 손짓이었다. 아들로 보이는 학생이 버스에 올라탔고 짐을 실어주던 어머니는 아들이 탄 자리 쪽으로 뛰어가 잘 가라는 손짓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손짓이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곁에 있어 든든하다면, 사랑받고 있다는 가장 큰 증거라 했다. 먼 길 떠나려는 소년은 외롭지 않았을 것만 같다.


마지막은 내 차례였다. 오랜만에 쥐어보는 종이 차표를 들고 올라탔고, 많지 않은 짐을 올려 실었다. 창밖은 여전히 반가운 봄비가 흐르고 있었다. 수줍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꽃도 환히 보였다.


때로는 내 안에 가지고 있었지만 오래도록 잊고 있던 감정들이 있다. 본래 내 것이었으나, 그렇지 못한 것으로 넘겨버렸던 것들. 그저 버스에 올라탔을 뿐인데 누군가 그 시간, 그 시절로 아주 잠시 데려다준 듯하여 많이도 고마웠다.

어쩌다 오늘 나는 짧은 여행을 떠났고 돌아오는 길의 내 마음엔 값진 선물이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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