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옛날 노래를 꽤 자주 들었다. 음악 테이프로 빼곡히 채워진 낡은 서랍장 옆을 꾸준히 지켜온 그것은, 당시 중학생이던 내가 공감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가사와 멜로디를 쏟아냈다. 지나온 세월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색이 바랬을뿐더러 가끔은 고장 나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스무 살 청춘이던 그 시절의 음악들을 내게 종종 들려주던 엄마였다. 그중에서도 당대 최고의 발라드 가수였던 변진섭의 <희망사항>은 어린 나조차 쉽게 흥얼거릴 만큼 익숙해진 노래였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여자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변진섭, <희망사항>
청바지가 참 잘 어울리고, 멋을 내지 않아도 멋이 나던 엄마의 그 시절은 오늘만큼이나 다채로운 풍경을 쏟아냈다고 했다. 신세대 음악이라 할 수 있는 대중가요와 팝 음악이 지금의 청춘 문화로 자리 잡았다면, 그 시절 또한 특별했던 젊음이 있었다. 대학가요제라는 문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했으며 큼지막한 안경과 헐렁한 청재킷을 걸치고 통기타를 연주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흐드러진 벚꽃, 그 푸른 잎들이 가을빛으로 바스러질 때까지 엄마는 기타의 잔잔한 선율에 목소리를 얹어가던 아름다운 노랫말들과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 외우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노래들이 이따금 가사까지 완벽하게 떠오를 땐, 그만큼 아낌없이 사랑했던 노래였구나 하며 발그레 미소를 띠던 엄마였다.
하지만 엄마의 그 시절 음악 취향이 내게 완벽하게 와닿을 리 없었다. 새로운 젊음을 누리는 나에게는 세련된 멜로디와 시끌벅적한 전자음악들이 훨씬 더 듣기 좋았다. 엄마의 취향은 우리들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조금 촌스러운, 그저 색이 바란 카세트테이프처럼 오래된 것일 뿐이었다.
“엄마, 이게 요즘 유행하는 노래야. 훨씬 세련되고 듣기 좋지 않아?”
“요즘 노래가 듣기에는 더 좋은 것 같긴 하네. 그런데 엄마가 좋아하는 옛날 노래들도 그땐 제일 멋진 노래였어.”
소녀처럼 새침한 표정으로 무심코 던진 엄마의 반박에, 문득 짧은 궁금증 하나가 스쳐갔다. 나의 청춘도 3,40년 뒤의 젊은 세대에게 조금은 촌스럽고 오래된 그것처럼 느껴질까. 나도 엄마처럼 특별할 것 없는 보통날들을 가끔은 그리워하게 될까. 아직 오지도 않은 먼 훗날의 감정이 지레 느껴지며 벌써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대학가요제와 변진섭의 <희망사항>을 열렬히 사랑했던 소녀는 어느새 두 대학생의 평범한 엄마가 되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모두를 경험한 나름의 축복받은 세대였던 엄마는 놀라운 기술의 발전으로 더 이상 색이 바란 카세트테이프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스마트폰의 검색 한 번으로도 최신 문화를 빠짐없이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선이 없는 길을 따라, 마음 가는 곳을 따라 흘러갔던 엄마의 청춘을 고스란히 담은 그 노래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 어딘가 투박하고 서툰 음악 취향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갈 수 없음에도 그들만의 추억이 깃든 음악이기에 누군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 비록 젊은 세대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아련한 그 시절을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음에 엄마는 만족했다. 울고, 웃고, 만나고 헤어졌던 그날들을 지나고 나서야 엄마는 그 시절의 음악이 당신들의 ‘청춘’이었고 ‘희망’이었음을 깨달은 셈이다.
그렇다. 끝없이 복잡하고 어렵기만 해 보였던 시간들을 멋지게 살아내고, 빛나는 청춘에 누구보다 반짝였던 엄마의 세대는 어지러운 그 시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변진섭의 <희망사항>과 대학가요제에 열광했던 피 끓는 청춘들. 청바지가 잘 어울리고 이야기가 별 재미없어도 환하게 웃어주던 그들이 참 뜨겁고 순수했음을, 나 또한 엄마처럼 더 이상 어리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야 조금씩 깨닫는다.
30년 전 엄마의 젊은 날들은 오늘의 나와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촘촘히 이어졌다. 과거와 현재,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청춘이 그러하듯 그녀의 젊은 날은 여기저기 북적대고 시끄러웠다. 세상의 눈치를 보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청춘 또한 그러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사회에 요구하는 여러 희망사항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엄마가 그 시절을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오늘의 내게 소중히도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있는 것만 같았다.
비록 지금은 힘에 부치는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우리일지 모른다. 바람이 꽤 많이 불고 봄비가 세차게 내리지만 떨어지지 않으려 있는 힘껏 버티는 싱그러운 나뭇잎처럼. 분명, 엄마의 젊은 날 또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분주했던 그 시절의 엄마가 수없이도 바뀐 계절의 틈을 넘어 남긴 위로의 말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린 누가 뭐래도 곱게 피어날 다음 세대의 소중한 ‘희망’이라는 것. 이전 세대와는 또 다른 시절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음을, 솜사탕에 살포시 붙어있는 설탕 실타래처럼 달콤한 날들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그러니 조금은 힘겨울지도 모를 지금 이 순간을 함께 견뎌보자고 말이다. 봄을 시샘하는 모든 것들에게서 온전히 한 송이 꽃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기 어려워도, 항상 기적처럼 꽃을 피워내지 않았던가.
오늘도 엄마는 그녀처럼 서툴렀던 그 시절의 음악을 찾는다. 겨울을 지나 향긋한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며 엄마에게 여전히 잘 지내냐는 안부를 묻는 오랜 친구를 마주한 것 같다. 반가움에 재잘거리던 젊은 날, 엄마의 푸르른 음성이 어렴풋이 들려온다. 여리지만 아주 또렷한 목소리. 나 또한 더 이상 엄마의 80년대 음악과 추억에 촌스럽다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의 취향을 온 마음 다해 응원하려 한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다가가, 이미 내게도 충분히 익숙한 그 멜로디에 함께 귀를 기울여 본다. 왜냐고?
뜨겁고 순수했던, 그래서 엄마에겐 시리도록 그리운 ‘개인의 취향’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