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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Dec 19. 2019

초콜릿 같은 거짓말을 세어보아요

두 커플이 나란히 카페에 앉아 있다.


그러다 문득, 한쪽 커플의 남자가 일어났다. 두꺼운 롱 패딩을 입은 그가 좁은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가로질러 빠져나가려던 순간, 옆 커플의 커피잔을 건드리고 말았다. 야속하게도 커피잔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아직 온기를 품은 채 한 가득 담겨 있었고... 조심히 움직이려 했으나 아쉽게도 둔탁했던 그의 움직임이 결국 커피잔을 쓰러뜨렸고 아메리카노는 고스란히 옆 커플 남자의 노트북 자판 위로 쏟아졌다(내 노트북도 아닌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아찔했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긴장감 넘치는 이 상황에서 다음 대사는 과연 누가 칠 것인가.


"죄송해요... 조심해서 지나간다는 게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일부러 하신 것도 아닌데요 뭘..."


흔한 막장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물 잔이 날아다니거나, 나쁜 손짓들이 춤추는 장면은 다행히 펼쳐지지 않았다. 원인을 제공한 커플 측에서는 거듭된 사과와 함께 피해 커플 측의 테이블로 음료와 빵까지 추가로 주문했다. 노트북에 아메리카노가 흠뻑 들어간 커플 또한 내가 예측했던 것보다 굉장히 젠틀하게(?) 사과를 받아주었다.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노트북 검사해보시고 비용이 들 경우에 연락 주세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일단 저희가 해결해봐야죠. 가보셔도 됩니다!"


롱 패딩 커플은 자신들의 연락처를 남겼고 피해 커플 또한 훈훈하게 받아주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이후에 본 장면은 꽤나 놀라웠다(이 풍경 하나로 나는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원인 제공 커플이 카페를 나가자마자 노트북 주인이었던 남자의 여자 친구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진짜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자기야 그냥 완전히 고장 났다 하고 새로 하나 사달라 해..."

"저렇게 사과하는데 면전에 대고 어떻게 그래? 일단 견적서 많이 뽑아보고 연락해봐야지, 어휴 별 일이다 정말."

"딱 봐도 좁은 길인데 왜 이쪽으로 지나가는 거야?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한 겨울 냉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던 장면은 순식간에 반전 스릴러물로 변했다. 이 모든 장면을 연속적으로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묘했다. 원인을 제공한 커플도 사과를 마치고 카페를 나서며 자신들의 씁쓸한 진심을 털어놓았을까. 오늘 참 재수가 없다거나, 저 사람 노트북 멀쩡한데 고장 났다고 하면 어쩌지? 와 같은 속마음.

사람들은 자신의 진심을 전부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것을 전혀 모르는 바보 같은 이 또한 없다. 때로는 그러한 거짓말들이 우리의 관계 유지와 세계 평화에 더 이로운 것일까. 초콜릿 같은 달콤한 거짓말들로 인해 역설적으로 누군가의 하루는 극단적으로 씁쓸해지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남자의 노트북은 어떻게 되었을까. 두 커플은 다시 만나게 되었을까. 오늘은 자기 전에 내가 몇 번의 초콜릿 같은 거짓말을 했는지 혹은 역으로 들었는지 세어봐야지. 하나씩 확인해보는 열 손가락이 많이는 접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오늘은 마음이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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