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 예의를 꽤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내가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울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이전부터 예의를 중요시하게 된 건 아마도 착한 아이 콤플렉스 때문 일거다.
어릴 때부터 나는 늘 부모님으로부터 ‘착하게 살아야 한다’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남을 배려해야 한다’ ‘부모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첫째고 장녀니까 동생도 잘 챙기고 양보해야 한다’라는 말을 무수히 들으며 자라왔다. 물론 틀린 말들은 아니다. 아이에게는 어른의 제대로 된 가르침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부모님은 내가 아이라는 걸 먼저 이해해주기보단 어른의 입장에서 원하는 말들을 많이 하셨다.
아이였지만 ‘~해야 한다’ ‘~챙겨야 한다’라는 압박감들이 점차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면 안 돼’ ‘나는 잘해야 해’ ‘나는 힘들어도 참아야 해’라는 강박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렇게 나의 욕구와 감정을 나도 모르게 억눌러 버렸다. 더군다나 눈치가 빨랐던 탓인지 부모님의 기대에 더 부응하기 위해 아이로서 마땅히 해도 되는 것들을 거의 하지 않으려 했던 거 같다. 편식을 한다거나 짜증이나 말썽을 피우지도 않을뿐더러 조용하고 착한 아이로 살며 그 흔한 사춘기도 겪지 않았다.
그저 알아서 학교를 잘 다니고, 알아서 친구들 잘 사귀고, 주변을 다 챙기고,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챙겨주지 않아도 혼자 뭐든 알아서 잘해나가는 어른 아이가 되어있었다. 주변 어른들은 그런 날 보며 어쩜 애가 이리도 착하고 손이 안 가냐며 부모님을 마냥 부러워했다.
그렇게 나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시작된 것 같다.
부모님이 그런 날 보며 기특해하고 자랑스러워하시니까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더 강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솔직하게 내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꾸만 남을 위해 희생하고, 싫어도 내색하지 않고, 모두에게 착하게 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점점 쌓여만 갔다.
그게 내 인생을 망치고 있는 줄 모르고 한참을 그리 살았다. 깊이 박혀버린 유리조각을 당장 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아파도 참고 사는 꼴이 되어버렸다.
선을 넘거나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화를 내거나 기분 나쁘다는 표현을 못하고 결국 내가 상처 받는 걸 택했다. 갈등이 싫었고 피하고 싶었다.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그동안 나의 인간관계는 상대가 원하는 걸 내어주며 주변 사람에게 맞춰 사느라 정작 나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예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니까 남들은 다들 날 보며 참 좋은 사람이라 했다. 돌아보니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나쁜 사람이었다. 타인을 위해 눈치 보느라 나는 나를 외면하고 자꾸 참고 견뎌버리면서 상처를 주었다. 그렇게 무리하며 보내다가 어느 순간 억압된 분노가 진짜 펑하고 터져버렸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내 한계를 넘어서는 줄도 몰랐다.
너덜너덜해진 후에야 진지하게 내 삶을 성찰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단단한 자아를 만들기 위해 책이나 인터넷 검색, 유튜브 영상들을 찾아보면서 도움을 받았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던 건지 다시 알아가야 했다. 특히 오은영 박사님의 영상들도 많이 찾아보게 됐다. 전문가의 분석이나 조언은 상당히 위로가 되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 큰 성인이라면 충분히 쉽게 바꿀 수 있을 거라 오해할 수도 있겠다.
오랜 시간 나의 기질과 환경이 얽혀서 습관이 되고 문신처럼 박혀버려서 생각처럼 한 번에 쉽사리 바꾸기는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나를 옥죄던 마음을 잘 알게 된 후로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고, 무조건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눈치 보며 사는 건 내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깨달았다.
무엇보다 베스트셀러 제목처럼 미움받을 용기를 갖는 게 우선 이었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지나치게 배려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괜찮다고 암시하는 연습도 해나갔다. 해야 할 말이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두는 게 아니라 제때 조금씩 표출하려고 의식적으로 조절했다. 거절할 때는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으로 의견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너무도 익숙해있던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해 조금씩 변화해갔다.
요즘은 착하다는 말이 결코 칭찬이 아닌 세상이다.
그만큼 착한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대우해주기보단 함부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때론 이기적이어야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세상에서 타인을 위해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행동은 사치로 여겨진다. 착한 게 아니라 싫은 소리도 하지 못하는 만만한 사람 정도로 보이기도 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존중 없이 무조건 순응하며 수동적이고 내 할 말도 하지 못하고 배려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호구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
이제는 착하다는 정의조차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선하고 착한 사람이 둥글게 좋게 사려는 건 분명 좋은 행동이지만, 자신이 힘든데도 속이면서까지 착해야 한다는 프레임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 인간으로서 기본을 지키고 성숙한 사람으로 살면 그만이다. 나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해야 하는 건 없다.
더 이상 남에게 주는 실망을 걱정하기보단 나에게 실망을 주는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아직도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계속 노력해나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