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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감 Jan 14. 2021

세 번째 수필

수험 - 2020.11

창 너머에 보이는 하늘이 회색빛으로 부연 것이 누군가 내 안경에 손가락으로 지문을 남긴 것 같았다. 날이 조금 따듯해져서 외출하기 좋은 온도구나 싶다가도 자욱이 낀 먼지 안개를 보면 선뜻 나가기 망설여진다. 그래도 외출할 때면 항상 끼는 마스크가 미세먼지도 어느 정도 막아주리라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대로변을 줄지어 선 은행나무들의 노란 잎들이 도시를 밝게 비추고 있다. 지난 계절에는 진한 녹색으로 안정감을 주었다면 지금은 화사한 색감으로 이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노란 무리들 사이에서 종종 보이는 단풍나무의 진한 붉은색이 주변의 노란빛과 대조되어 무척 도드라진다. 홀로 붉은 것이 위축될 법도 한데, 오히려 여기 주인공은 자신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이 당당하다.


수많은 은행잎이 뒤덮은 거리를 걸어간다. 긴팔에 가벼운 외투를 하나 걸쳤을 뿐인데 등어리에 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와 다름없었다면 이맘때쯤은 본격적인 추위와 함께 수능이 찾아왔어야 했을 텐데.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 기억나는데, 수능 한파라는 것은 사실 전국에 있는 수험생의 학부모들이 조상님을 비롯하여 온갖 신들을 불러낸 탓에 기온이 뚝 떨어져 생긴 것이라 했다. 수능이 미루어진 올해는 절묘하게도 11월의 둘째 주가 되어도 춥지 않은 점이 그 우스갯소리에 신빙성을 더한다.


11월만 되면 괜히 긴장되는 시절이 있었다. 처음으로 수능을 치지 않은 해에는 가까운 친구가 수능을 치는 바람에 정작 본인보다 내가 더 목요일 아침에 긴장했었다. 대학물을 제법 먹었지만 수험생활이 아직도 기억의 언저리에 있는 탓에 당일의 상황이 절로 그려졌다.


잠을 설쳤지만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진 이른 아침과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부모님이 고사장 정문까지 데려다주셨던 길, 힘내고 오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뒤로한 채 혼자 내딛는 발걸음과 국어 시험 시작을 1분도 남기지 않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교실. 100분의 수학 시험을 어찌어찌 치르고 나면 기진맥진한 상태로 도시락 뚜껑을 연다. 긴 시간 집중하느라 바닥난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맛을 느끼는 둥 마는 둥 하며 꾸역꾸역 밥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일 년에 한 번 치르는 중요한 시험이라 할 지라도 식곤증은 눈치가 없는 편인지 하품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면 밖으로 나가 가볍게 운동장을 한 바퀴 거닐고 돌아온다.


마지막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답안지를 내려놓고 시험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동안 멍하니 있는다. 그간의 노력이 정당한 성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자신 있는 과목에서 과연 얼마나 좋은 점수를 얻었으며 반대로 취약한 과목에서 나는 얼마나 덜 손해 볼 수 있었을까. 분명 차가 막힐 텐데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려나, 알아서 집으로 간다고 말할까. 오늘 밤에는 뭘 하지. 친구들은 잘 쳤을까, 먼저 연락해도 되려나. 퇴실해도 좋다는 감독관의 말이 들리기까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차고 돌았다.


가장 어린 사촌동생이 올해 수능을 본다. 요식업으로 진로를 정한 동생에게 이 시험은 당시의 내가 느꼈던 것만큼 무겁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19살이 겪을 수 있는 경험 중 가장 거대한 이벤트일 테니 좋은 경험하고 오라고 말해주려 했으나, 어련히 스스로 잘하고 있는 듯해 특별한 말을 남기지 않았다. 나는 사촌동생의 경우와 같이 부지런히 자신의 진로를 탐색해 일찌감치 그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무척 대견하다. 가깝게 지내던 미용사 누나가 본인은 고등학생 때부터 미용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는 분명 나의 경우와 대비되었기 때문일 테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자를 동경한다고 하던가.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 공부밖에 할 수 없었던 나는 그런 류의 사람들을 동경하고 있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목표를 위해 꾸준히 노력을 쌓고 온갖 억압과 힐난을 이겨내고 결국에는 꿈을 이루는 사람들은 빛이 난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인간이 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끈기 있게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할 것이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쌓는 것은 미미한 흔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제법 구속력이 강하다. 다만 그 굴레가 버겁지 않은 것은 다행스럽게도 내가 문장을 짓는 것이 즐거운 덕이겠지.


먼저 어른이 되어버린 형은 늦게나마 하고 싶은 것을 찾고 나서 머리를 싸매며 단어를 고르고 있다. 철없는 꾸러기 같던 동생 녀석은 어느덧 내년이면 함께 술잔을 부딪칠 수 있게 된다. 마냥 귀여운 동생으로 대하기에는 징그럽게 훌쩍 커버린 너를 이제부터는 함께 늙어가는 처지로 대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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