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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감 Jan 17. 2021

다섯 번째 수필

나에 관한 모든 것 -  2020.12

창 밖을 보고 있으면 세로로 길게 늘어져 있는 두 개의 줄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 건물 외벽 도색을 위해 있는 것이겠지. 몇 달 전에 아파트 주민들을 대상으로 외벽 도색 디자인 선정에 관해 설문조사를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설문조사를 해서 이제야 칠하는구나. 지난주보다는 덜 춥다지만 야외에서 활동하기 좋은 기온이 아닌 것은 여전하다. 그럴 거면 아예 겨울이 되기 전에, 그러니깐 춥지 않고 시원할 뿐인 10월 즈음에 작업하면 안 됐을까. 물론 이 결정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과 상황이 고려됐을 것이다. 가령 시공업체가 가능한 날짜가 12월이었다든가 도색에 필요한 자재를 구하는데 시간이 걸렸다든가 기온이 낮아야 시료가 잘 마른다든가. 시공업체 사람들은 아무렇게 않게 작업하고 있는데, 정작 따듯한 실내에 있는 나는 그분들을 보며 덜덜 떨고 있다. 무척 추울 것 같은데, 높기도 엄청 높고.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절대로 외벽 도색은 못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갑자기 방에 그림자가 어둑하게 지길래 깜짝 놀라 창 밖을 보니 양다리가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어느덧 우리 층 외벽을 칠할 때였구나.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 창 밖에 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뜬금없지만 대체 저 줄은 얼마나 긴 걸까 궁금해졌다.


아직 해가 밝게 도심을 비추는 오후 네시에 가까운 시간. 빌린 책을 반납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창백하게 하얀 반달이 박혀 있었다. 너무 맑아서 텅 빈 하늘은 왠지 쓸쓸하다. 솜사탕을 대충 찢어놓은 듯한 구름이 드문드문 떠 있는 편이 더 반가운 것은 구름 사이를 비집고 쏟아지는 볕에서 생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랄까.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이겨내고 나에게 닿은 이 한 줄기의 빛이 대견하고 괜히 더 따스하다.      


공사를 마친 도서관은 꽤 멋들어졌다. 계단만 있던 것을 일부 벤치로 바꿔서 좀 더 활용성 있는 공간으로 변했다. 날이 좋아진다면 저곳에 앉아 볕을 받으며 책을 읽어보고 싶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의 대로변에는 자동차와 버스가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나는 자리에 앉아 책장을 읽고 넘기기를 반복하고. 턱 밑까지 몸을 담고 있던 시간이란 강을 잠시 빠져나와 발만 담근 채 강변에 걸터앉는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물줄기로부터 눈을 돌려 이제는 까마득한 상류를 한 번 바라보고 또 고개를 돌려 앞으로 흘러갈 곳을 살펴본다. 아득하게 이어진 이 물줄기는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3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어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책을 고를 순 없었다. 저번부터 눈여겨본 책 한 권, '이사카 고타로'의 다른 책 한 권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까지 총 세 권을 빌려 도서관을 나왔다. 학기 중이라면 2주 안에 세 권의 책을 읽는 것이 빠듯할지도 모르지만, 방학이고 또 송년회라든가 약속들이 모두 취소돼서 시간이 많아진 지금은 게으르게 굴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8월 말부터 읽은 책들이 전부 '이사카 고타로' 혹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책이어서 그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작가의 책을 읽는 것은 설레고 또 기대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친숙한 이름에 비해 막상 읽은 것이 두 권밖에 되지 않았다. '용의자 x의 헌신'과 '다잉 아이'. 두 권 모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기억이 있다. 다만, 작중 분위기가 회색빛 하늘처럼 무겁고 음산하게 일관되는데 그러한 분위기가 책이 흥미진진한 것과는 별개로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어서 '다잉 아이'를 마지막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한동안 손대지 않았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꺼리는 건 아니다. 장르를 가린다기보다는 어떤 분위기에서 서사가 진행되는지가 중요한데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시민 시리즈'라든가 '고전부 시리즈'처럼 무겁지 않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추리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너무 진지하게 진행되는 것은 취향이 아니랄까, 무거운 분위기의 소설은 끈기 있게 읽지 못하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이 음침한 것도 아니거니와 작가의 작품들을 좀 더 읽어보고 내 입맛에 맞다 안 맞다를 판단해도 늦지 않다 생각해서 오랜만에 그의 책에 눈길을 줬다. '녹나무의 파수꾼'이라는 책인데, 책의 표지도 마음에 들었고 뒷면의 줄거리를 읽어보니 지금까지 경험한 그의 책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고민하지 않고 집어 들 수 있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전부터 눈여겨본 책, '도쿠나가 케이'의 '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 일지'이다. 아직 절반 정도밖에 읽지 못했지만 빌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글이 무겁지 않고 담담하게, 또 희미하지만 저 멀리 희망이 보이는 것 같은 서술은 글자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30분이 되기 전에 도서관을 나온 나는 세 권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하나 없이 맑고 해는 아직도 머리 위에 떠 있고 달은 변함없이 창백했다. 돌아가던 길에 내 무릎 높이보다 작은 꼬마 아이를 마주쳤다. 할머니로 보이는 분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씩씩한 것이 할머니의 도움 없이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는 푸른색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스웨터에는 'all about me'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나에 관한 모든 것. 그 아이의 모든 것을 듣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일주일? 아니, 한 달?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에 혼자 멋대로 답하면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그 줄은 정말 얼마나 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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