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분히 내향적인 나라는 사람이 타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생각을 적어봤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가볍게 읽어준다면 좋을 것 같다.
제한된 체력으로는 제한된 양의 상호작용만 할 수 있다.
독서나 영화 감상과 같은 무생물과의 상호작용은 물론이고 생물체와의 상호작용, 그것이 동물이 됐든 사람이 됐든 모든 상호작용은 체력을 소비하며 이루어진다.
무생물과의 상호작용은 대상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생물체의 경우보다 수월하다.
‘상태’라고 두리뭉실하게 표현했지만 좀 더 적절한 표현은 ‘정신적 상태’ 일 것이다.
독서를 예로 들자면,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책의 기분까지 고려하며 읽진 않는다. 그날은 책이 피곤해하길래 한 단원 밖에 읽지 못했다, 같은 상황은 현실에서 없다. 불의의 사고로 물에 젖어 책의 ‘물리적 상태’가 훼손돼 독서가 불가능한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책의 ‘정신적 상태’, 예를 들어 책의 감정을 배려해 독서를 미루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호작용하는 대상이 생명체가 된다면 대상의 현재 기분이나 상태 또는 평소 취향, 성향 등을 무시할 수 없다. 대상의 ‘물리적 상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상태’를 헤아리지 않고서는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기대하기 어렵다. 상대방이 전혀 관심 없는 주제로 혼자 떠들어 대는 것처럼 마주하는 대상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일방통행의 관계는 애초에 ‘상호’ 작용이라 부를 수 없을뿐더러 바람직한 관계라 볼 수도 없다. 요컨대 무생물과의 상호작용에 비해 생물체의 경우는 신경 써야 할 점이 더 많고 자연스레 더 많은 체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호작용에 있어 체력이 소비되는 정도는 제각각이다.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자리와 비교해 그렇지 못한 자리는 훨씬 더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마음을 터놓는 친구와의 자리는 솔직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지만, 직장 상사 혹은 거래처 사람을 마주하는 자리는 소속된 조직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는 상황이므로 온전한 자신을 꺼내기 쉽지 않다. 낯선 상대를 대하는 자리 또한 다르지 않다. 상대가 기대하는, 바라는 모습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할 때도 있을 것이고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마지못해 자리를 지켜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연기하고 참다 보면 더 빨리 체력이 닳고, 더 일찍 지치기 십상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상호작용이 체력을 소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체력을 소비하는 대신 이에 상응하는 충만한 상호작용, 예를 들면 안정된 정서적 교감이 이루어진다면 몸은 피곤할지언정 정신적인 만족감 덕에 오히려 기운을 얻는 효과를 보기도 한다. 다만 이는 낯선 이와의 만남보단 익숙하고 편한 관계에서 기대할 수 있다.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은 분명 설레는 일임과 동시에 조심스러운 과정이기도 하다. 미움받을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한 것은 아닌지, 혹시 실수한 건 없는지 생각하게 되는데 내가 호감을 가진 대상이라면 더욱 그렇다. 누군가와 거리를 좁힌다는 건 섬세하고 주의가 필요한 작업이다.
일련의 과정이 부담스러워 인맥 넓히기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로 충분히 만족하며 지내고 있지만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분명 등장한다. 다만 그 사람과 거리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좁히기 위해 나의 제한적인 체력을 쓰기보단 안정적이고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보장된 나의 사람들에게 체력을 투자하자는 마음이 더 크다. 그런 식으로 흘려보낸 인연이 아쉽지만 적지 않다.
이런 나라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애착이 클 수밖에 없다. 다른 데서 체력을 아끼고 그들에게 더 쓴다는 마음이 기저에 깔려있어서 기대했던 만큼 상호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멋대로 실망하고 속상해하기도 한다. 그러면 한동안 꿍해있다가 또 별거 아닌 일로 풀어지는 것을 반복하는데 나 같은 유형의 사람은 나라도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