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의 꿈은 과감히, 아니_선택할 수 없어서 버려졌다.
나는 일반고로 진학했지만, 그래도 미술은 계속할 수 있었다.
입시 학원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기술로서의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유롭게 그리던 그림에서
틀에 박힌 형식 미술로 넘어가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예고는 포기했지만, 미대의 꿈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집 형편은 점점 나아졌다.
엄마의 지난 세월의 고생을 보답받듯,
하는 일마다 잘 풀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원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온 나라가 “대~한민국!”을 외치던 그 시절,
나는 대한민국 고3이었다.
고3을 앞두고, 나는 결국 홍대 앞 학원으로 옮겼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는 “너를 위해서”라며
나를 그곳에 데려다 놓았다.
그 학원을 가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지금도 그 근처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살면서 그렇게 많이 맞고 욕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곳 학생들은 이런 환경이 익숙한 듯했지만
나는 늘 긴장했고,
주눅이 들어 잘하던 것도 못하게 되었다.
학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아래만 서면 눈물이 먼저 났다.
아마 나는 그동안
누군가와 치열하게 경쟁해본 적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나는 늘 남이 먼저, 나는 맨 마지막.
양보가 몸에 밴 아이였다.
누군가를 이기고 앞서 나가야 하는 경쟁이
어색했고,
무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안했다.
예체능 고3은 수능과 실기를 모두 준비해야 한다.
국영수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과외 선생님을 붙여주었다.
미술 학원비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재료비, 교통비, 식대…
미술은 그야말로 ‘돈덩어리’였다.
그런데 국영수 과외까지 더해지니
엄마가 나에게 쓰는 돈이 얼마나 큰지
머릿속 계산이 저절로 돌아갔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형편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나 자신에게 쏟아지는 이 큰 투자와 기대가 더 무서웠다.
혹시라도
내가 실패한다면..
그 모든 게 무너져버리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