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려진 얼굴, 드러난 재능

by 이음하나


10번의 치료는 정말이지 혹독했다.

가기 전에 마취크림을 듬뿍 바르고 가는데, 그렇게 바르고 가도 힘들었다.
아니, 어쩌면 가는 길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았다.

그땐 집에 차가 없어서 아빠와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꼭 하교 시간이라 학생들이 많았던 지하철.
나는 머리로 얼굴을 잔뜩 가리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앞에 앉은 남학생들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보며 큭큭댔다.

이미 그런 것엔 이골이 났던 나는
웃든 말든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떨구어진 고개가 그때 내 마음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당당하지 못한 나_

살이 지져져 시커먼 딱지가 덕지덕지 앉았고
딱지가 떨어질 때쯤이면 하얀 새살이 드러났다.
아팠지만, 그동안의 놀림과 수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쯤이야.’

이것만 끝나면 나는,
드디어 평범한 고등학생이 될 테니까.

치료 경과는 놀라웠다.
10번으로 약속했는데 8번 만에 끝났다.

나와 18년을 함께 살았던 오타모반은
그렇게 내 얼굴에서 떠나갔다.
더 이상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어졌다.

정말 행복한 18살이었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그리고, 나는 그 행복이 계속될 줄 알았다.








미술을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도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나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했던 사람이다.
무엇을 배우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나는 미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땐 미술이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과목인지 몰랐다.
엄마는 ‘알겠다’고 했지만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느 날, 엄마는 친구에게
이 동네에 미술학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엄마 친구는 집에서 가르치는 선생이 있는데
아이도 많고 가르침도 좋다고 추천했다.

학원도, 과외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하지만 내 인생을 바꾸는 곳이었다.

선생님은 늘 내가 그리고 싶은 걸 마음껏 그리게 해 주었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본인 차에 태워
고궁으로 데려가 그림을 그리게 했다.
바쁜 부모님 때문에 주말 나들이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던 나에게
주말마다 나가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세상에서 제일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난생처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겼다.
그게 참 좋았다.

중3까지 그곳을 다니며 실력이 쑥쑥 늘었다.
선생님 큰딸이 미대생이었는데
그 언니는 내 그림을 보고 말했다.

“하나야, 너 그림은 좀 고풍스럽다고 할까? 깊게 느껴져.”

고풍이 뭔지도,

깊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도 몰랐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 1개였던 나는
더 몰두했고, 그래서 더 늘었을 것이다.
나는 그걸 ‘딱 하나’ 했으니까.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너 예고 갈 생각 없니?”

그 무렵 나는 큰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고,
그 대회에서 예상치 못하게 최우수상을 받았다.

학교에서 그림 하나로 날고 기던 애가 따로 있었는데
뜻밖에도 내가 상을 타버린 것이다.
그 뒤로 미술 선생님들이
예고 준비생이냐며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지난번 대회에서 최우수상 탔어.
선생님이 예고 갈 생각 없냐고 했어.”

잘했다는 말보다 먼저,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거… 돈 많이 들어서 안 돼.”

나는 그 대회가 그렇게 큰 대회인 줄 몰랐다.
알았더라면, 예고를 준비하던 그 친구에게
그 상을 양보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상식 날,
나는 말도 없이 버스를 타고 혼자 상을 받으러 갔다.
엄마에게 말했으면 왔을까?
아마 바빠서 못 왔을 것이다.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부모님들이 꽃다발을 들고 아이들을 축하해 주는 풍경이
나에겐 너무 어색했다.

사회자는 장려상부터 차례로 호명했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최우수상.

빨간 카펫을 밟으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뒤에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도 없었고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지만
정작 더 부끄러웠던 건 따로 있었다.

중1 때 35kg밖에 안 나가던 나에게
엄마는 ‘교복은 다시 살 수 없다’며
가장 큰 치수를 사주었다.
어깨가 두 개 들어갈 만큼 컸던 그 마이를 입고
그 단상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상보다,
그 맞지 않는 교복이 더 부끄러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