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날씨가 좋습니다. 자꾸 하늘과 산을 보며 멍 때리고 싶어져요.
그래서 갑자기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손가락 접어가며 꼽아보자니 그런 때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어느 순간을 꼽기 어렵더라고요. 제 인생이 그렇게까지 드라마틱하지 않아서일까요.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옛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등장하는 사건사고 가득한 그 시절, 떠들다 보면 웃음만 나는 그 시절이 지금까지는 그 호시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저는 수다 꼭지라는 별명을 가졌었어요.
수다스러운 아이였고, 뭐가 그리 서러운지 술만 마시면 눈물이 났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참으로 민폐가 아닐 수 없는 친구였는데 버리지 않고 여태까지 찾아주는 친구들이 퍽 고맙습니다. 비어 OO 같은 저렴한 안주 구성에 양은 푸짐한 그런 맥줏집을 주로 가던 시절이었어요. 안주발을 세우며 맥주잔을 비우고 있다 보면, 어느새 구석에서 엉엉 울곤 했습니다. 친구들이 왜 우냐고 물으면 했던 대답은 '이유는 모르겠는데 눈물이 나'였습니다. (감성적이었지요....) 지금도 생각나요. 그때 그 친구의 어이없다는 표정. 그럼에도 친구들은 늘 다정하게 절 달래주었고, 그러면 저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면서 잘 놀곤 했어요. 아마 그 다정함 한 스푼과 토닥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때가 저에겐 질풍노도의 시기였거든요. 제가 부릴 수 있는 어리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날은 스무 살의 첫 1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마지막 과제 제출을 끝낸 종강 날이었습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던 적당한 계절이었고, 가벼운 점퍼 차림의 맑은 날이었습니다. 1교시 수업을 마친 뒤라 시간은 좀 이른 평일 오전이었고요. 과특성상 과제가 많았어서 한 학기 내 다들 잠을 못 자 허덕이면서 보냈었어요. 과제도 해야 하지만, 놀기도 해야 하니까요. 체력이 남아돌던 시절이라 밤샘을 해도 거뜬했었어요. 대부분은 수업에 캡 모자를 쓰고 오곤 했죠. 유행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밤새고 머리를 못 감아서요. 그런 와중에도 어찌어찌 친한 그룹이 생겼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알 수 없는 조합의 멤버들이었는데 우리끼리 종강 날에는 방학 전 MT를 가자고 했었습니다. 모두 사는 곳이 달랐고, 몇몇은 지방 본가로 내려가기도 해야 했거든요. 그때의 저는 방학을 하고 나면 바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날씨도 좋았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주던 당일에 마지막 과제의 여파로 다들 피곤했던가봐요. 누군가가 그냥 집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고 분위기가 어째 어째 그렇게 형성되고 있었어요. 부모님과 살았기 때문에 어렵사리 외박 허락을 받고 여행 갈 꿈에 부풀었던 스무 살의 저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지요. 저라고 밤을 안 새웠겠습니까만 비몽사몽이라 그랬을까요. 캠퍼스 한복판에서 엉엉 울었습니다. '다같이 놀러 가기로 했잖아..ㅠㅠ....약속했잖아..엉엉' 하면서요.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말이죠. (네.. 제가 진상이에요.)
결국 우리는 청량리역으로 가서 미리 예약해두었던 통나무집으로 기차를 타고 MT를 갑니다. 제가 어린애처럼 울어서 동기 언니 오빠 친구들이 같이 가준 거죠. 지금도 멤버들을 만나면 그때 얘기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때 여행이 꽤나 즐거웠기 때문에 지금은 술자리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때 가길 정말 잘했다고요. 우리만 아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생겼으니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임 내에 썸이라곤 단 한 톨도 없어서 이성애 제로의 동기애만 가득한 멤버들이지만 그래서 더욱 오래가는 친구들이라 저는 좋습니다. 바라는 게 없는 쿨한 관계랄까요.
그때 시절 얘기를 하면 웃음이 먼저 납니다. 사실 다 별 볼 일 없는 사건들인데도요. 이제와 돌이켜보면 다 빛바랜 듯 아름다운 청춘의 기억이거든요. 하지만 어린 우리들은 그때 나름대로 얼마나 치열했을까요. 현실을 몰라서든 모르고 싶어서든 원하는 건 뭐든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패기 넘치던 시절이기도 했을 테고요. 그래서 더 반짝이던 날들이었을 테지요.
어쩌면 지금까지 지나온 만큼의 시간을 또 보내고 나면 지금 시절도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화양연화는 미래엔 없고 과거에만 있는 걸까요. 미래가 불투명한 흰색 도화지라고 하면 과거는 투명한 셀로판지 같거든요. 과거는 들여다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 나빴다 판단이 가능하지만, 미래는 그렇겐 못하잖아요. (아.. 물론 날마다 긍정 회로를 돌립니다만..) 기억이라는 게 과거에는 몰랐어도 지나고 보면 꽤 괜찮은 날인 경우도 많으니까요.
어쩌면 보송보송했던 그 날들을 지나왔기 때문에 추억에 대한 애틋함으로 지금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에게 이런 미래가 준비되어있었다고 생각하면 그때의 나에게 좀 더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기도 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계속 치열하고, 엔딩은 쉽지 않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