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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Oct 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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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조각모음 #13. 신호등의 초록불이 들어오면.




당황스러운 상황인데도 다정하게 대답해 주는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초록불이 깜빡거리는 횡단보도를 바쁘게 건넜다. 길을 건너오니 이 상황을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던 그놈이 배시시 웃으며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지연우!"






'저 자식이...'


여자는 이를 앙다문 채 아직 초록불이 깜빡이며 줄어드는  숫자가 유난히 더뎌보이는 신호등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신호등 아래에 서서 여자는 앞에 서 있는 그놈을 쏘아보았다. 멀쩡히 서있는 남자를 보자 얼음이고 뭐고 세상 맑은 얼굴로 웃고 있는 이 녀석을 지금 눈앞의 풍경에서 전체 삭제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작년 이맘때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녀석이 스스로를 지워버렸던 게.. 연우의 일상에서 아무 예고도 없이 사라진 게.

그런데 지금 와서야 왜..? 왜 다시 눈앞에 나타난 거지. 하필 지금?  연우는 이번에야말로 절대 휘둘리지 않고 녀석을 잘라내어 버릴 거라고, 완벽하게 무시해주겠다고 분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다짐하고 있었다.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네? 아무한테나 소리 지르는 거 하며."



녀석이 여전히 선하게 생긴 얼굴로 키들키들 웃으며 특유의 긴 손가락으로 여자의 머리칼을 흩뜨러트렸다. 귀여운 강아지라도 본 듯 한 장난스러운 얼굴로. 예기치 못한 행동에 이 놈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곱씹으며 다짐하던 머릿속 상황과는 달리 심장이 갑자기 펌프질을 시작했다. 두근두근... 아.. 씨.. 이 심장 놈이 왜 이래..



"잘 지냈어? 더 귀여워졌다. 연우 넌.. 보고만 있어도 재밌는 것도 여전하고."



연우는 녀석이 흩트려놓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정리했다. 이건 페어플레이가 아니잖아. 예전에도 그랬듯 웃음기 머금은 선한 얼굴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인사를 건네는 녀석의 목소리가 일 년 만에 듣는 건데도  불구하고 익숙한 건 물론이고 심지어 반가워 연우는 거듭 당황하고 말았다. 

이성과 감정이, 몸과 마음이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는 통에 빨리 뭐든 강하게 대꾸를 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씩씩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못 한 채 연우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냐 이건. 열 받아서 그래 열 받아서. 말려들지 말고 내 할 말을 하자.'

녀석에게 아무것도 들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우였다.




"야! 너.. 뭐 뭔데?! 왜 또 내 인생에 끼어드는데!"




아차차... 또는 뺄 걸..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려던 말이 정리가 되기도 전에 튀어나와버린 연우는 그 와중에 단어를 취소하고 문장을 정리하고 싶었다. 

안돼. 실수하면 안 된다. 틈을 보여선 안돼. 절대. 이를 앙다물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야야.. 눈에 힘 좀 풀어. 뭐 인생씩이나~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기도 쉽지 않은데 좀 반가워해주라~

우리 엄청 오랜만인데. 나는 이 동네 온 지 얼마 안돼서 낯선데 여기서 연우 너 만나서 너무 반갑단 말이야.

이 편의점 자주 와? 자, 이건 받아가야지. 이 오빠가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사주는 거다. 아까 부딪힌 데는 괜찮고? 유리는 안 깨졌던데? "



연우의 유난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이때까지 동네 친구 만난 듯 대하던 남자는 여자 앞으로 얼음이 담긴 봉지를 쑥 내밀며 아무렇지 않게 자기 근황을 툭툭 내뱉었다. 연우는 얼음도 받지 못한 채 멀거니 서서 쉴 새 없이 뭐라 뭐라 얘기하는 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지난 일 년 간 미워했다가 그리웠다가 때론 상상으로 만나기만 하면 죽이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그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 눈이 거기서 여자를 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소리 내어 말하는 입이 있었다. 일 년 전에 봤던 것과 똑같은 그 얼굴이었다. 




연우는 이제야 실감이 났다. 

내가 드디어 너를 다시 만나버렸고. 녀석이 또 내 일상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게.


왜 자신이 편의점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왔었는지 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목구멍 언저리에서 뭔지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꾸물꾸물 올라와 목구멍을 막고 연우의 목소리를 잠기게 했다. 왈칵 쏟아지듯 치밀어 올라버린 감정이 얼굴에 드러날까 녀석에겐 들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손에 들고 있던 빨간 모자를 급히 눌러썼다. 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진정해. 지연우. 제발.. 이러지 마.'




울상이 된 얼굴을 가린 채 숨 죽이고 가만히 있는 연우와 남자의 머리 위로 다시 한번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이 깜빡이고 안내 멘트를 쏟아내고 있었다.




'삐비 빗... 이제 건너도 좋습니다.'




남자는 무심하게 앞에 선 여자의 붉은 모자 위로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얹었다.

눈물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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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근한 매거진 }에서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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