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OOO님. 이쪽으로 오세요.
OOO님. 12번 진료실 앞에서 기다려주세요.
OOO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날은 하루 동안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불렸을 양의 내 본명을 마음껏 들었던 날이었다.
이렇게 성까지 붙여 풀네임으로 불리는 내 이름이 생경하다. 이렇게 오래 불렸어도 아직도 나의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발음의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얼굴을 모르는 채로 내 이름만 먼저 들은 사람들은 보통 실제의 나와 다른 나를 떠올리곤 하는 것 같다.
이 날은 건강검진을 하는 날이었다.
회사 근처의 병원이었고 전 날 밤부터의 금식으로 공복인 채로 병원의 안내데스크에 도착하여 우선 번호표를 뽑고 이름을 대는 것으로 시작한다.
띵동~13번 환자분~
"8시 예약했는데요. OOO입니다. "
진료실에 들어서면 간호사 선생님이 내 이름을 한번 더 물어본 뒤 생년월일까지 꼼꼼히 확인한다. 기록상의 나와 실제 나를 대조하는 작업이 상당히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곳은 역시 병원과 공항 정도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가장 최근에 본명이 불렸던 장소도 병원이었던 것 같다. 백신 접종을 위해 찾았던 병원에서 말이다.
"OOO님. 주사실로 와주세요." 이름이 불리고 호달호달~떨며 진료실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우린 사회에서 보통 이름보다는 직책으로 불린다. 특히 직장에서 말이다. 일단 나자신을 오롯이 드러낼 수 없는, 드러내선 안되는 사회적인 역할이 부여되는 곳이기 때문인가 보다. 그나마 요즘에는 이름에 '님'을 붙여서도 많이 부르는 문화가 많다. 아닌 게 아니라 자음이 된소리인 'OO씨'보다는 'OO님'이 아무래도 좀 더 부드럽고 존중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도 되도록이면 직급이 없는 사원들에게는 님을 붙여서 말하곤 한다. 특히 메신저라던지 메일 등의 이름이 글로 쓰이는 경우에 말이다. 눈으로 보는 글자라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마 아직은 이름보다는 성+직책 정도가 가장 흔하지 않나 싶다. 아니면 영어 이름을 쓰기도 하고 말이다. 요즘엔 그렇지 않지만, 예전엔 혹은 아직도 어른들은 부모가 된 자식들을 OO엄마, OO아빠라고 불렀다. 우리 엄마 역시 아직도 아버지를 부를 때 'OO아빠'라고 부르고 계신다. 보통은 그 집의 첫째 이름이 들어가는데, 어른이 되어서야 둘째이하 자녀들은 그에 대해 꽤나 서러워했다는 사실을 접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는데, 나는 첫째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본가에 가면 엄마의 그 호칭이 얼마나 잘 들리던지.. 왠지 하나뿐인 동생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오래 전에 휴학중 사무실 관리 알바를 할 때였다. 그 사무실에 종종 계신 어르신 중 한 분은 나에게 꼭 "O양,+존댓말"을 쓰셨다. 양이라니... 그러나 그분은 교장선생님을 지내고 은퇴하신 거기 계신 어르신 들 중에서도 매너가 좋은 신사분이었다. 그럼에도 아마 30년대생이라는 그 분이 살아온 환경에서 존중한다는 건 손녀뻘인 나에게 존댓말을 꼬박꼬박 쓰는 것, 거기까지였으리라. 거기 일하시던 어르신들이 3일짜리 여름휴가를 가는 아르바이트생인 나에게 십시일반 모아서 봉투에 담아주신 휴가비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사회전반적으로 호칭이 순화되고 조금 더 평등한 언어에 가까워지는 것만큼 사회가 합리적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까? 그만큼 어쩌면 이름이라는 건 아주 공식적이거나, 아주 사적인 사이에서나 쉽게 부를 수 있는 것인가보다.
나는 SNS 혹은 커뮤니티 등에서는 철저히 닉네임 혹은 익명으로 활동한다. 어쩌면 내 안에 포함되어 있을 다양한 부캐들을 특징적으로 드러내기에 그만큼 좋은 게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닉네임이란 건 나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물론 보통 깊은 고민이 담긴 좋은 이름이겠지만) 후천적으로 생겨난 나의 습관이나 성향과 같은 특질을 다 포함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10년 이상 함께 지낸 남편조차 이름이 아닌 닉네임(확실히 애칭은 아니다.)으로 나를 부른다. 나 또한 본명보다 닉네임이 자연스럽게 들린다.
최근에 자주 연락하는 친구가 종종 문장 끝에 내 본명을 붙여서 말했다. "그렇지 않니? ㅇㅇ야?" 이렇게.
친구는 습관적으로 이름을 붙여 부르며 의견에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신분증에 쓰인 글자 그대로 불리는 내 이름이 가끔 낯선 이유가 자주 불리지 않아서라면, 친구 덕에 조금쯤 잊었던 내 이름을 돌려받은 기분도 들며 선선히 친구의 의견에 동의하곤 한다. 나도 조금쯤 다정하게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이다.
"맞아. OO야."
그래서 때로 불리는 이름은 정체성이 된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지금은 '도토리 작가님'이다. 내가 어디 가서 작가 소리를 듣겠는가..?
역시 작가라는 호칭을 붙인 것만으로도 감성지수가 차오르는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이름이나 호칭이란 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20대에 아르바이트할 때 필요해서 썼던 영어이름을 필명으로 쓰겠다했더니 친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름은 당시 내가 좋아하던 사진작가의 이름이었는데, 지금 보니 나랑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상큼한 이름이라고 한다. 종종 외국 여행가면 본명이 외국인들에겐 발음이 어려워서 그 이름을 종종 썼는데...이 참에 괜찮은 영문이름을 하나 만들어 둬야겠구나.
그리고 문득 우리 집 고양이들에게 미안하다.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은 노란 털이 있어서 노랑이, 노랑이가 낳은 첫째라서 일호, 넷째라서 사호다.
노랑이가 노랑이인 이유는 브런치(바로가기)에 적어두었다. 사실 성의없이 지었다기보다는 최초에는 입양을 보냈어야해서 그랬다. 이후 이름을 바꾸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9년 동안 한 놈도 잔병치레 없이(큰 병은 한번 겪었으나, 모두 회복함) 잘 커준 걸 보니 옛 어른들이 개똥이 이렇게 하면 건강하다 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는 게 영 거짓말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까지 쓰고나니 나도 친구들 이름을 생략하거나 혹은 닉네임으로 부르거나 했구나 싶다.
이제부터 내 사람들의 이름을 조금 더 다정하게 불러주는 습관을 가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