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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Jan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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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조각모음 #21 레몬

3시 20분...


그가 사라진 지 20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긴장한 연우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잠시만'은 대체 얼마쯤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한 시간이 지났고 연우는 그를 기다릴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한은 결국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학교 근처의 조용한 카페를 찾아 책장을 넘기고 있는 연우였다. 책과 노트북, 그리고 각종 필기도구까지 주르륵 펼쳐놓고 벌써 두 시간째 자리에 앉아있었다. 

조용한 보사노바가 흐르는 이 카페는 친구들 사이에 인기였다. 근처 카페 중 유일하게 아인슈페너를 파는 카공족의 안식처. 머릿속이 복잡할 땐 단 맛이 당기곤 했다. 연우의 아인슈페너도 테이블 위에 있었다. 하얀 크림은 커피에 녹아 납작해진 채. 시선 끝에는 전공책이 펼쳐져 있다. 마지막으로 책장을 넘긴 게 대략 오 분쯤 된 걸로 보이지만 어쩌면 그보다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지금 저 책에 담긴 문장들이 이해를 받고 있긴 한 걸까?



연우는 마땅히 그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그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은 다음 날.

전공 수업 시간 멍하니 SNS를 뒤적거리던 연우 옆에 E가 와서 털썩 앉았다.


"연우! 너 그 사람이랑 썸?"

"뭐? 누구?"



E는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연우와 같은 지역 출신이라 친해졌다. 고등학교는 달랐지만 알고 보니 중학교는 같이 다녔는데, 당시엔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다. 둘 다 나서진 않는 타입인 이유였을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대학에 와서 마치 못다 한 공부라도 하듯 수업과 과제와 간혹 알바까지 쳇바퀴 돌 듯 그저 부지런한 연우와 달리 E는 대학이 체질이라는 듯 동아리와 각종 스터디에 로맨스까지 숨겨진 인싸력을 뽐내며 교내 각종 사건과 가십을 연우에게 전해주는 메신저였다.


짝! 소리와 함께 등짝이 시원해졌다. 

E가 힘주어 말했다.


"뭐야? 이 새침은! 나한테까지 이럴래?

  누구긴? 세상 반갑게 너를 부르던 그분 말이다~ 

  왜 이래? 강의실 최고의 인싸께서?"

"내.. 내가.. 무슨.."

"너 교양수업에서 완전 인싸 됐다며~ 어째 안 듣던 수업을 골라 듣는다 했더니, 그래서였어~?

 어떻게 아는 사인데? 제이한. 나도 소개 좀 해주라."

"아.. 야 몰라. 모르는 사이야."

"뭔 소리야? 너 그 사람이랑 썸 탄다고 소문이 짜한데?"



"..... 진짜 몰라. 제대로 얘기해본 적도 없단 말이야."



그간의 일.. 이란 것도 없는 먼지같이 사소한 일을 E에게 말했다. 정보라도 좀 알아내 볼까 하는 마음에.

그런데 E도 제이한이란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교환학생이라는 것 말고는. 정보랄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때론 존재조차 잊을 만큼 습관적으로 마시던 레모네이드의 레몬 슬라이스를 어쩌다 한입 깨물게 되었을 때 순식간에 입안에 침이 고이고 때론 눈물이 찔끔 나는 신 맛에 정신이 번쩍 들고 그 순간에야 이것의 주연이 레몬이라는 걸 불현듯 깨닫듯이 그가 그랬다. 

어딘가에 고요하게 있다가 완전히 눈부시게 나타나 버린 것이었다. 

새콤한 레몬처럼. 아주 자극적인 방법으로.


입학하고 1학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2학년이 돼서야 스스로 무얼 할지 고민을 시작했다. 전공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선택했는데 어렵고 재미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게 재미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뒤늦은 사춘기에 방황하듯 도서관에 들렀다.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책을 읽어도 좋았고, 그저 도서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만 쬐고 있어도 그 순간엔 숨이 쉬어졌다. 그렇게 별 볼 일 없이 연우는 4학년이 되었다. 도서관으로 도망가는 횟수를 줄였고 그저 취업을 위해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대체....'



처음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엔 머리를 감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러다간 궁금해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굳게 다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부터는 아예 머릿속에 자릴잡았는지 생각이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호기심을 유발하려는 계획이라면 정말 제대로 성공한 셈이었다. 



여전히 책은 168페이지에 머물러있었다. 

아인슈페너의 얼음 조각이 소리를 내며 커피잔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내일은. 수업이 있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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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 미지근한 매거진 }에서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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