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치던 날
어느 날 퇴근을 호텔로 했다.
눈이 아주 많이 왔던 날이었다.
집에 못 가는 게 속상하기보다 오히려 기혼자인 내가 합당한 이유로 혼자 있을 수 있는 찬스가 생겨서 꽤 기분이 들떴었다. 게다가 내 차엔 외박 가방이 실려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언제든 하루쯤은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나의 숨구멍 같은 가방.
남이 꾸려놓은 이부자리에 남이 해주는 밥을 먹는 편안한 삶으로의 하루짜리 사치를 꿈꾸며
일회용 콘택트렌즈와 여벌의 옷, 간단한 화장품과 읽을 책 한 권, 그리고 좋아하는 향과 홀더가 담긴.
결혼 후 외박을 종종 했다.
외박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쩐지 모종의 일탈 같은 느낌과 달리 장소만 집이 아닐 뿐 대부분 아니 100% 남편과 함께였다.
주로 장소는 그의 프로젝트 사무실 근처의 비즈니스호텔이었는데, 위치는 대부분 강남권이었다. 새벽 두 시에 퇴근하고 아침 여섯 시 반에 출근하는 사람이기에 왕복 출퇴근 시간이라도 줄이도록 회사에서 제공하는 근처 숙소에서 자는걸 권해도 혼자는 싫다는(하.. 너란.. 남.. 편) 그 때문에 덩달아 퇴근을 호텔로 하곤 했던 게 그 시작이었다. 당시의 나는 반 프리랜서 상태로 조금 자유로웠기 때문에 내가 종종 이동을 하곤 했었다.
늘 아무것도 필요 없는 남자와 달리 나는 이것저것 필요한 여자라서 그 이후로 가방을 꾸려놓은 것이었고.
일명 외박 가방! 이 가방이 내 차에 실려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자유로운가 말이다.
그리고 가방을 꾸려서 차에 실어 놓은 후 처음으로 혼자 외박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회사에서 1.5km 거리의 비즈니스호텔까지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10분 이상을 달려서야 겨우 도착했을 정도로 눈이 많이 왔는데도. 호텔에 가서도 남은 일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노트북을 챙겼어야 함에도.
나는 좋았다.
그리고 호텔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내다보며 연 외박 가방에 운명처럼 들어있던,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눈보라'
크.. 완벽하다 완벽해.
말은 진작에 준비되었지만 나는 역참지기와 그의 딸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과 작별을 고했다. 역참지기는 내게 안전을 빌어주었고 그의 딸은 나를 마차까지 배웅했다. 현관에서 나는 발길을 멈추고 그녀에게 입 맞추게 해달라고 청했다. 두냐는 승낙 했다... 그간의 무수한 입맞춤을 헤아려 보았는데,
내가 입맞춤이란 걸 한 이래로,
나에게 이렇게 오래도록, 그리고 이렇게 달콤한 추억을 남긴 입맞춤은 없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눈보라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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