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패션업계 30년, 후배와 함께 자라는 베테랑의 자리
30년 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하지만 막상 뒤돌아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간 듯하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의 나는 두려움과 설렘 사이에서 허둥대던 신입이었다. 선배들이 건네는 단어 하나하나가 낯설었고, 원단 하나를 만지면 무게와 촉감을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러던 내가 어느새 세월의 무게를 등에 지고, 이제는 '베테랑 경력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요즘 나는 중국에서 본사와 공장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원부자재를 찾고, 생산 공장을 연결해 오더를 진행하는 일이다. 어제도 예고 없는 요청이 내 하루를 흔들었다. 본사에서 위챗(중국sns) 단체방으로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가을용 야상 점퍼 원단을 찾아야 해요. 면 소재면 좋고, 워싱은 필요없어요. 블랙 컬러 현물 원단으로 200장 생산 예정이에요. 리오더라서 급해요. 다음 주에는 선적되야 베트남 생산 일정에 맞출 수 있어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무겁고도 긴박한 요구가 담긴 메시지였다. 스와치조차 보내줄 시간이 없다는 말에 나는 잠시 웃음이 나왔다. 사전에 계획했던 원단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라인 생산 설계는 최소 3개월 전에 예약되어야 한다. 당장 라인 중지 상황이 발생했다는 걸 이내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원단 분실이든 발주 실수든 문제가 발생했다는 얘기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급한 건 확실했다. 납기가 늦어지면 베트남 생산라인 브로큰 차지를 물어줘야 할일이 보였다. 원단 정보가 부족해도 일은 돌아가야 했다. 문제가 생긴 빈자리를 채워내는 건 현장에서 쌓아온 경험이었다.
블랙컬러라고 하면 그냥 블랙이지. 뭐가 달라?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블랙은 단순한 색이 아니다. 사람들은 검정은 다 똑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는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어떤 블랙은 푸른 기운이 띠고, 어떤 블랙은 묵직한 숯처럼 깊은 색을 낸다. 빛의 각도에 따라 녹빛이 돌기도 하고, 차가운 회색이 묻어나기도 한다.
블랙 컬러의 종류는 이렇게 다양하다.
Black 기본 블랙
Jet Black 가장 강렬하고 진한 블랙(대부분의 브랜드가 선호)
Deep Black 깊고 짙은 농도의 블랙
Pitch Black 빛 반사가 거의 없는 극흑 블랙
Charcoal Gray 블랙과 다크 그레이 중간톤(가을, 겨울 컬렉션에 자주 사용)
Graphite Black 흑연 느낌의 메탈릭 딥 블랙
Onyx Black 반짝이는 흑옥 같은 고급 블랙
Ebony Black 따뜻한 나무톤 블랙(우드, 가죽/가방 원단에서 종종 사용)
Coal Black 무광 느낌의 블랙(데님, 코튼 워크웨어에 자주 등장)
High Fastness Black 고견뢰도 블랙(세탁, 일광 견뢰도 높음, 원단/염색 스펙 표시용)
Matte Black 무광 블랙(스포츠웨어, 아웃도어 원단에 빈번하게 사용)
Gloss Black / Shiny Black 유광 블랙(패션 액세서리, 합성피혁에 자주 사용)
이번에 본사에서 요청한 블랙은 가을 초입에 어울려야 했다. 아직 햇볕이 따뜻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너무 두껍지도, 너무 얇지도 않아야 한다. 옷을 걸쳤을 때 안정감을 주되, 답답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시장에 재고 600yds를 보유하고 있어야 하기에 black 의 범위를 좁혀서 요청하는건 무의미했다. 범위를 좁혀서 현물 원단을 수배해봐야 없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경험이 없다면 이 미묘한 경계를 맞추기가 어렵다.
현물 소재를 찾을 때는 범위를 최대한 넓게 찾는게 찾을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다.
200장 생산이라고 했으니 60" 대폭 기준 대략 요척 2.6yds(로스 포함 3yds) 기준 600yds를 계산했다.
현지 원단 수배처에 나는 이렇게 요청했다.
compositon : cotton 100%
weight : 220~250g
color : black
Weave : any plain / any twill
stock 600yds
fob shanghai
ETD 9/25 EX 9/24(ex-factory)
조건은 단순하지만, 이 몇 줄에 30년 경험이 담겨 있다. 어느 정도 무게면 가을 점퍼로 적당한지, 현물 원단을 찾으려면 어느 시장을 뒤져야 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사실 10년 차 시절이었다면 이런 요청은 나를 한참 당황하게 했을 것이다. 스와치 없이는 확신을 갖기 어렵고, 제한된 시간 안에 조건을 맞추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은 내 몸에 감각을 남겼다. 원단의 무게를 만져보면 가늠할 수 있고, 어떤 거래처에 어떤 재고가 있을지 감이 온다.
회사에서 나를 혼자 해외에 내보낸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경험이 쌓이면,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은 무겁지만, 동시에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 준다.
신입(중간 경력자)은 '소중이'다
요즘 본사에서는 3~5년차 중간 경력자를 뽑기가 어렵다고 한다. 들어와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패션 업계는 화려해 보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해야할 일은 많고, 급여는 높지 않으며, 늘 시간에 쫓긴다. 그래서 신입은 금세 지치고 떠난다. 중간 경력자는 더 귀하다. 대리급 정도가 되면 대우가 좋은 회사로 이직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신입과 중간 경력자를 '소중이'라고 부른다. 귀찮아서가 아니다. 아직 일을 제대로 모르는 그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어제 위챗으로 연락온 대리급 직원 역시. 이 요청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지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방법이 없고 항주지사를 믿었기에 가능한 요청이었을 터이다. 나도 그런 유대리의 마음을 알았기에 기꺼이 돕기로 했다.
30년 전, 나 또한 '소중이'였다. 매일 실수하며 불안해 하던 내가 선배들의 울타리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그때의 나를 지켜준 선배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이제는 지난 날의 선배들의 울타리의 자리를 내가 맡을 차례다.
이번에도 결국 나는 조건에 맞는 원단을 찾아냈다. 단체방에에 수배된 원단 정보와 스와치 사진을 먼저 보냈다. 실물 스와치는 핸드케리로 한국 본사로 현물 보유 공장에서 직송(직접 배송하도록) 조치했다. 송장사진까지 올리고 난뒤에야 유대리는 메시지를 남겼다. "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스와치 받는대로 확인 후 회신하겠습니다.!" 그녀의 짧은 인사 한마디였지만, 그녀의 안도의 한숨이 들리는 듯했다.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서운할 때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붙드는 건 관계다. 내가 울타리가 되어줬을 때, 함께하는 동료직원은 넘어지지 않고 배워나갈 수 있다. 언젠가 그들도 또 다른 울타리가 되어 세대를 이어나갈터이다.
나는 여전히 패션업계에서 버티고 있다. 매일 새로운 문제와 마주하고, 때로는 불완전한 요청 속에서 답을 찾아내야 하는 미션을 수행한다. 그것이 내가 30년 동안 배운 일이자, 앞으로도 감당해야 할 역할이다.
경험은 나를 지켜주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것을 후배를 품는 힘으로 쓰는 일이다. 아직 경력이 많지 않은 동료는 소중하다. 그들이 안전하게 배우고 성장 할 수 있도록 품어주는 울타리가 필요하다. 나는 그들에게 울타리 역할이 되어 줄 수 있다.
세월은 나를 이 자리에 데려다 놓았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울타리 속에 있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를 품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 자리가 주는 의미를 사람을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안다. 옷을 만드는 일이 간단하게 원단을 찾고 완제품 생산을 해주는 역할을 넘어 관계를 이어주는 자리이다.
오늘도 나는 또 다른 요청을 받는다.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길 위에서 나는 계속해서 배운다.
"신입은 소중이, 나는 울타리"
이 단순한 문장이 내 30년의 패션업 이야기를 대신해 준다.
급한 메시지가 또 올라왔다.
"부장님!! 에코백 사진 보내드린거랑 똑같은 패턴 원단 찾아주세요! 급해요!!"
아놔.......실컷 좋은 선배라고 써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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