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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웅 Sep 09. 2023

최근에 사랑한다고 말했던 순간

오스틴 말고 신영웅

필라테스를 다녀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허기가 진다. 냉장고 양문을 열어 젖힌다. 냉동칸에 안치된 쌀밥을 보니 스티브 로저스를 깨운 닉 퓨리가 된 기분이 든다. 스티브를 전자렌지에 돌리고는 멸치볶음과 진미채를 꺼내 상을 차린다. 어제 먹다 남은 오뎅탕까지 재탕하니 완벽한 점심식사 완성.


유튜브를 켜서 썸네일만으로 간밤의 해외축구 소식을 훑는다. 딱히 볼만 한 영상이 없다. 그냥 멸치볶음에 집중하기로 한다. 반 정도 먹었을까? 디스크 5번과 6번 사이가 시큰거린다. 잘못 움직였다간 또 팅- 하고 튕겨나갈 것 같아 자세를 최대한 고쳐 앉는다. 툭하면 삐끗하는 부분이라 놀랍지도 않다. 여전히 멸치볶음에 집중한다.


어라? 통증이 점점 커진다. 더 정확히는 날카로운 칼로 요추를 찌익 긋는 느낌. 그 칼은 요추를 지나 옆구리까지 이어진다. ‘어? 이거 뭐지? 드디어 망가진 건가? 아직 몇 년 더 버텨줘야 하는데. 회의 시간 20분 밖에 안 남았-’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방금 전까지의 워커홀릭 코스프레는 온 데 간 데 없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내의 얼굴. 아내에게 구조 요청하고는 정신줄 놓기 전에 오늘 멤버에게 전화한다. 회의는 나 없이 진행해 달라고.


그 사이 119 대원들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집에 도착했고, 6명이나 되는 대원들이 들것으로 나를 구급차 안으로 옮겼다. 차 안에서 나는 “살려주세요. 너무 아파요.”만 곰인형처럼 반복했다. 배를 누르면 “허니~ 알라뷰!”만 반복하던 그 곰인형처럼. 앰뷸런스를 한참 타고 가는데 구급대원 한 분이 내 엉덩이를 툭툭 치더니, “환자분, 아무래도 디스크가 아니라 결석인 것 같아요. 중앙병원 대신 한라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려요. 저도 아파봐서 아는 데 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이게 산통이랑 비슷한 정도거든요!”


아니 산통의 끝에는 아이라도 나오지만 이 통증은… 아, 돌이 나오는구나. 칼로 찢는 듯한 느낌에서 도끼로 찍어내는 듯한 통증으로 바뀌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기억도 흐릿해진다. 가까스로 응급실에 도착해 마약성 진통제를 맞았지만 통증은 가시질 않는다. 나는 “살려주세요”에서 “수술해주세요”로, 마지막에는 “그냥 죽여주세요”라고 말하는 숨 죽은 곰인형이 되어 있었다.


아픔을 참기 위해 다리를 벌렸다가 오므렸다가, 허리를 접었다가 폈다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신체의 수축과 팽창 동작을 하고 있을 때쯤 다른 주사가 링거액을 타고 들어왔고 나는 가수면 상태가 됐다. 반쯤 감긴 눈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눈물을 그렁대고 있었다. 나는 그 실루엣에 대고 한 마디만을 남기고 잠이 들었다(고 한다.)


“자기야, 애기 낳지 말자. 너 너무 아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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