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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웅 Sep 17. 2023

책상물림의 새 신발

제주로 오기 전에는 하루에 천보를 걷지 않은 날이 많았다. 오전에 집에서 지하주차장까지, 회사 주차장에서 사무실까지 걷는 것이 전부였다. 오후라고 달랐을까? 야근으로 말라버린 몸뚱아리를 끌고 비디오 테이프를 뒤로 감듯이 그대로 반복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책상물림으로만 살던 인간이 제주에 와서는 매일 만보 이상을 걷고 있다. 운동 말고, 온전히 노동으로.

문제는 내 발이 이를 견디지 못하는 이상 체형이란 것. 배흘림기둥처럼 완만한 곡선이 발바닥을 타고 흐르는 정상적인 발처럼 보이지만, 보기에만 그럴 뿐 엄지발가락의 구조가 남들과 달라 발의 피로를 쉽게 느낀다. 평발이었으면 군대라도 가지 않았겠지만 보기엔 멀쩡해서 이등병 때는 고생 꽤나 했다. 당시엔 내 의지가 약해서 남들보다 더 힘들어하는 줄만 알고 자책했다. (이후 서른이 넘어서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군생활 꽤 힘드셨겠어요” 할 때 그 선생님을 와락 껴안을 뻔했다. 유일하게 알아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카페 마감을 하고 밤마다 부은 발 때문에 소파 등받이가 아닌 좌방석에 등을 대고 박쥐처럼 티비를 봐야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발이 편한 신발을 찾아다녔고 편하다고 하는 신발이란 신발은 모조리 사서 신어봤다. 특히 클로그 제품은 버켄스탁, 크록스 같은 유명 브랜드의 제품부터 SNS 대박템 태그가 붙은 기능성 제품까지 모조리 경험했다. 그렇지만 죄다 아쉬움만 가득한 채 신발장을 채우는 데 그쳤고, 그때마다 내 등짝은 아내의 스매싱 연습용으로 전락했다.


기나긴 방황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정착한 것이 모 클로그(Mo clog). 가장 먼저 발견했지만 가장 늦게 산 녀석이다. 늦게 산 이유? (철저히 주관적인 내 기준에)일단 못 생겼다. 이 투박한 녀석에게 내 발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방황의 시기가 더 길어진 것도 있다. 둥지 잃은 새마냥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나의 발은 어쩔 수 없이 모 클로그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웬 걸?!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발바닥의 상피세포에서부터 닳아없어진 무릎 연골을 지나 전두엽까지 만족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와 이 녀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엄지발가락의 이상 구조로 인해 몸의 균형이 앞으로 쏠려 있었는데, 이 신발은 내 몸을 살짝 뒤로 밀어줬다. 발가락이 들려 있는 기분이랄까? 손오공이 근두운을 처음 탔을 때도 이렇진 않았을 것이다. 삼장법사 일행 대신 서역을 몇 번이나 다녀와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편안함을 가진 신발을 만난 것이다.


“I'm on a cloud nine.”

분명 단테도 이 신발을 신었다면 동의할 것이다.


봄과 여름을 지나오면서 벌써 3켤레나 샀다. 블랙과 크림 컬러를 골고루 샀는데, 크림의 착화감이 더 뛰어나다는 결론. 왜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크림 컬러가 한층 더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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