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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영웅 Sep 27. 2023

이종공포(異種恐怖),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오스틴 말고 신영웅

기억이란 게 남은 순간부터 다른 종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었기에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종(種)을 만지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아, 물론 인간 중에서도 손길조차 닿기 싫은 개체도 있지만.) 당연히 반려동물은 내 인생 그 어느 한 구석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날이 왔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을 가게 되면서 고모님 댁에 객살이를 하게 됐는데, 이 집에는 거역할 수 없는 룰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뽀미의 저녁 산책. 저녁 식사를 마치고 누가 됐든(주로 가장 낮은 서열에 위치한 사람이) 이 집의 실세인 뽀미를 모시고 양재천을 걷다 와야 했다. 그리고 이는 객식구인 나도 포함이었다. 참고로 뽀미는 매우 작고 연세도 제법 든 노부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이종공포감으로 인해 그녀가 한없이 무서웠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사촌형들이 노부인을 안고 있지 않으면 나는 방을 나설 수조차 없었다.


보통 포메라니안은 갈색이나 흰색 털을 가진 녀석이 일반적인데, 이 부인은 몸통 대부분이 검은 색 털로 덮힌 희귀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안 그래도 무서운데 외형조차 낯설다보니 더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런 내게 드디어 떨어지면 안 되는 미션이 떨어졌다. 다들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 상상. 군에 간 사촌형들을 대신해 단둘이 양재천을 한 바퀴 돌아야했다.


혈액원 앞 계단으로 내려와 대치중에서 구룡중까지 찍고 와야 하는 제법 긴 구간. 물론 혼자였다면 땀도 안 날 정도의 조깅 코스지만 내게는 군대가는 길만큼이나 마음 무거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에 노부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나를 향해 돌아보거나 짖지 않게 하는 데에 모든 집중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골목을 빠져나와 양재천 입구로 들어설 때부터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계속 발생했다. 지나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뽀미를 보자마다 달려 든 것. 내게 만져도 되냐고 물으면서 이미 손과 얼굴은 뽀미의 얼굴과 맞닿아 있었다. 물론 안된다고 답할 생각도 없었지만. 빨리 끝나야하는 산책길이 너무 더디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 불안감은 안중에도 없는지 계속 부인의 존함과 종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렇게 터닝 포인트 근처에 다다랐을 때 한 여성이, 정확히는 스무 살 당시 시신경을 제외한 내 모든 신경을 마비시킬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 나에게 달려들, 아니 뽀미에게 달려들며 말을 걸었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시, 신영,웅이요.”

 “네?!”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뽀미를 와락 들쳐 안고 집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때 확신을 했다. 나는 이 노부인과 친해질 수 있을 것이란 것을. 아니 이미 나의 두 팔과 심장은 감사와 욕망의 감정으로 그녀를 가득 안고 있었다. 포비아 따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집에 사는 동안 밤산책은 나의 일이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뽀미고요, 흔치 않게 검은 포메라니안이에요. 그리고 저는 신영웅이고 스무 살이에요. 대구에서 왔고요. 혹시 남자친구 있으세요?’


지금 생각하면 이 문법적으로 비문은 아니지만 사회관계학적으로 철저히 비문인 저 문장을 수없이 연습했지만 한 번도 해볼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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