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영웅 Dec 07. 2023

사장은 에이스 투수가 아닌 대주자가 되어야 한다

한라산에 올랐습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할 일이 산더미인데 살고 싶어서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최근 홧병으로 아슬아슬한 상태였거든요.

솔직히 감사한 일이죠. 아니 과분한 일이죠. 신생 회사에게 이렇게 일이 많다는 건 그만큼 많은 분들이 찾아준다는 것이고, 더 많은 기회를 얻었다는 뜻이니까요. 특히 최근에 스누트까지 외주가 아닌 내주(?)로 하면서 식탁에 앉아 제대로 밥을 먹을 시간까지 없어지는 스케줄을 살다보니 모든 식사 시간은 업무 미팅 시간이거나 일하면서 밥 먹는 시간이거나.


배부른 소리갔지만 진짜 매일매일 발 밑이 무너지는 느낌이에요. 진짜 솔직히 말해서 어미새처럼 모두 제 입만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이 너무 미웠습니다. 이건 주니어만 그런 게 아니라 시니어까지 전부 그러고 있으니 홧병까지 났습니다.


카톡을 1시간만 안 봐도 100개가 쌓이는 일상에서 정말 차도에 발을 내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울컥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조금 천천히 살려고 제주를 왔는데 여전히 서울에서의 삶을 반복하고 있는 스스로한테 화가 났습니다.


왜 나는 배려받지 못하는가 하는 마음 때문에 다들 미웠습니다. 다들 말로 위로를 건네고 그 말 끝에 일도 함께 보태더군요. 본인이 해보고 제게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그냥 일단 토스부터 하고 보는 상황이 쌓이다보니 잘 받아주다가 폭발하는 거죠.

그러나 이게 누구 탓일까요? 당연히 저죠. 그렇다고 제가 마이크로 매니징의 대가(?)라서 모든 걸 제 손바닥에 올려놓는 애도 아닙니다. 그러기엔 케파도 부족하고, 매크로 오브 매크로한 인간이기도 하고. 다만 저는 일이 어딘가에서 막히거나 애매한 그레이존이 발생하는 걸 못 참는 사람이다보니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해결하다보니 어느새 실무를 다 하고 있더라고요.


쉽게 말해서 깊은 외야 안타를 맞고 외야수로서 공을 받아서 중견수한테 던져주고는 어느새 홈플레이트로 달려가 포수 역할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니 홈에서 태그가 계속 늦는 악순환의 반복.


그래서 용기를 내서 윗세오름에 도전했습니다. 4시간 정도 되는 코스인데다가 감기에 목이랑 허리 디스크가 심해졌고, 게다가 며칠 전에는 허리까지 삐끗해서 최악의 컨디션이었지만 뭔가 본능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안하면 멘탈 디스크가 터질 것 같은 본능적 감각이 저를 산으로 보내더군요.

역시나 너무 힘들었어요. 산악인이 된 아내에게는 그저 산책 정도의 코스였지만 몸과 마음이 망가진 제게는 저승길처럼 느껴졌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아내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가는 틈틈히 서로 꼬옥 껴안아 주었습니다. 엄청 위로가 되더라고요.  


자고 일어났더니 온몸이 당기고 몸은 무거운데, 반대로 홧병이 좀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지더라고요.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자고 났더니 해결...! 뭐 이런 건 아니죠. 여전히 머리는 뜨겁고 마음은 지쳐있죠. 그렇지만 다행인 건 단순히 일의 우선순위를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 일을 종속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뭘 그만해야 할지가 조금씩 떠오르고 있다는 거예요.


작은 회사다보니 감독이 아닌 플레잉코치가 되어야 하는 건 맞지만 굳이 에이스 투수나 중심타선이 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게 중요한 건 '플레잉'보다는 '코치'니까요. 대신 대주자나 지명타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펑크가 나고 실수가 발생하더라도 그냥 멤버들이 직접 수습을 할 수 있게 기다리는 연습을 해보려고 합니다. 멤버들이 신나게 플레이 할 수 있게, 그들이 기회를 만들 수 있게 판을 만드는 것에 더 집중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꼭 점수가 필요한 상황에 동료가 친 안타가 점수가 될 수 있게 발 빠른 대주자가 되어주려 합니다. 에이스 투수가 투구에 전념할 수 있게 지명타자가 되어보려 합니다.

회사에서 에이스들이 주로 퇴사를 합니다. 그리곤 사장이 됩니다. 그렇게 팀을 꾸려선 자기도 모르게 에이스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장은 굳이 에이스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다간 팀웍을 망가뜨리거나 멤버들의 능력을 전부 활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대신 기회가 왔을 때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서 동료들이 타점을 올릴 수 있게 득점만 해줘도 충분합니다. 방관이 아닌 관찰입니다. 베이스에서 언제라도 득점을 할 수 있게 헤드업을 하고 판이 돌아가는 걸 관찰해야 합니다. 뛰어야 할지 멈춰야 할지, 뛴다면 홈까지 가야할지 3루에서 멈춰야 할지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장은 선발 투수가 아닌 대주자만 되어도 충분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잘난 체하려고 하는 마케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