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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운트 Feb 12. 2022

빼앗겨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은밀한 결정》, 오가와 요코

소설가인 주인공이 태어나 살고 있는 '섬'은 주기적으로 '소멸'이라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사물이 하나씩 말 그대로 사라지는 거죠. 하루는 리본이, 그다음 소멸에서는 향수가, 다음 소멸에서는 새들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조용히 '소멸'이 일어나면, 다들 사라진 것에 대해 그리워하고 슬퍼하지만, 이윽고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떠올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잃어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 세계에서 소멸한 것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는 사람들은 강압적인 비밀경찰들에게 강제로 체포되어 사라집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도 그러했고요. 그리고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점차 몸을 숨기며 숨죽여 살아가고,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소멸을 견디며 속수무책입니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수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오가와 요코의 《은밀한 결정》은 독보적인 분위기와 상상력을 갖고 있습니다. 잔잔하고 고요해 보이지만 혼란과 불안함이 곧 터져 나올 듯 가득하죠. 삶에 존재하는 당연한 것들이 하나씩 사라져갈 때, 그리고 감시와 통제가 더 가까이 다가올 때의 긴장감이 강력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멈출 수가 없네요.


"옛날에 누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요. '책을 불태우는 자는 결국 인간을 불태우게 된다.'" - 본문 중에서


이 작품은 오가와 요코가 1994년에 처음 발표했다고 해요. 하지만 2019년에 미국과 유럽 등지에 소개되면서 뒤늦게 조명 받고 있는데요, 확실히 지난 세기에 읽었다면 지금과 같은 감흥을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 같네요.


어린 시절 누구나 낡은 종이상자나 책상 서랍 귀퉁이에 자신만의 소중한 것을 모아두곤 했었잖아요. 반짝거리는 단추나 매끈한 돌, 먼 나라에서 온 편지에서 떼어낸 우표 한 장 등.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하나씩 사라져버렸고 나는 그것을 기억하거나 그리워하지도 않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꼭 읽어보셨으면 하는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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