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내내 꽃이 피는 곳

by 황복희

로스앤젤레스의 서쪽으로 가면 트인 태평양이 펼쳐져 있다. 널푸른 바다를 끼고 차를 몰고 도로를 따라가다가 왼쪽으로 굽으면 비치마다 백사장이 너무 넓고 길다. 또 길이 오른쪽으로 굽으면 해변 언덕 능선을 따라 멋진 집들이 햇살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자리 잡고 몇 채씩 보였다가 안보였다 하면서 조용히 한적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 도로가 왠지 한적해지면 오른쪽으로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그곳엔 정말 가보기도 힘든 부촌이 있는데 누구나 거기 산다고 하면 감탄사를 뿜는 말리부라는 부촌이 있다.

그런 곳에 내가 어쩌다 6개월 정도 살게 됐었다. 마을 입구에 아주 유명한 박물관도 있어서 사람들이 어렵게 찾아가기도 한다는 데 나는 그냥 그 앞을 아침저녁으로 무심히 지나쳐 다녔었다. 맨날 다니던 마을 아래의 도로도 나중에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걸 보았다. 부촌의 마을은 너무나도 알뜰하게 관리되어 있었고 늘 조용했다. 지진에 대비해서 집들은 나지막하게 지어져 있고 집과 집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 뿐 화려하거나 경계가 심하지 않았다. 하루는 마을을 둘러보다가 진한 핑크살구색으로 올 페인트칠이 된 집을 발견했다. 주로 베이지와 화이트 톤인 집들 사이에서 너무 튀는 색깔이었다. 핑크살구색 집의 담장 위로 연자주색 꽃송이들이 강한 햇빛을 그대로 맞으며 무너질 듯 늘어져 피어 있었다. 너무 과한 듯 그러나 너무 멋진 내가 이해하기 힘든 색감의 조합이라 그 후로 내내 잊히지 않고 생각이 나곤 했다.

건조한 푸른 하늘, 강한 햇살과 붉은 꽃을 입은 진한 핑크색의 집이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리고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후에 그 식물 이름이 부겐베리아이며 따뜻한 나라에는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월동은 안되지만 온실에서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봄에 꽃집에 갔다가 우연히 그 꽃을 찾아내고 인터넷으로 바로 핑크살구색 부겐베리아를 주문해서는 여태 베란다에서 잘 키우고 있다. 이 꽃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오직 햇빛만 있으면 자라고 꽃이 핀다. 아쉽게도 여름에는 전혀 햇볕이 들지 않는 남향인 우리 집 베란다는 빛이 들기 시작하는 10월이 되어야 꽃이 피기 시작하고 11월이면 송이가 되어 만발한다. 뜨거운 햇살을 만들어주기 위해 아침 10시부터 낮 2시까지는 거실 큰 창과 바깥 창문을 꼭 닫아 준다. 그러면 이 곳은 바깥 세상과는 달라진다. 이 꽃이 베란다에 갇혀 바람도 없이 꽃만 피울 것이 아닐까 해서 시든 꽃잎을 따주며 창을 활짝 열어 주기도 한다.

해가 제법 기울었다. 햇빛이 이제 베란다까지 들어왔다. 여기서부터 뜨거운 햇빛과 남국의 꽃과 파란 하늘이 계절을 잊고 점점 진해져 가며 우리집만의 꽃잔치가 겨우내 벌어지게 된다.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부촌도 하늘도 바다도 그리고 멋지게 굽은 도로도 없이 따뜻한 햇살만 있으면 무너질 듯 피어나는 꽃의 순수함을 알게 된 나는 물주고 세워주고 잘라주며 계절에 따라 잘 가꾸어 주고 있다. 꽃은 어디에 있어도 피고 여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