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생각이 난다. 춘위엔 샤우치에서 잘하는 훠꿔 식당에서 밥을 거진 다 먹고 앉았는데 조카가 사진 찍어 준다고 카메라 쳐다보랬다.좀 웃으랜다. 계속 웃고 있었는데 말이다. 밥도 맛있게 먹었던 터라모처럼느긋하게 표정을 지어 보였었는데 말이다.
그 무렵 안부를 묻는 사람들도 줄었고 집에 놀러 오시라 해도 잘 오지 않더니 조카가 방금 찍은 사진 속 가족사진을 보면서 단방에 왜 그런지 알듯했다. 아이들은 몸이 경직됐고 어른들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부담스러움이 덩어리 져 있었다고나 할까.
처음 거기 살러 갔을 때 우리는 칼라풀했었다. 낡지 않은 색감. 아파트 경비는 친절했고 시장에 가면 환대받고 길에 서면 가던 택시도 우리 앞에서 일단 멈췄다 갔었다. 한인 모임에 가면 어서 오라 좋은 자리를 내주었던 것 같다. 하버 호텔에 가면 로비에 고급스러운 뷔페가 있었는데 딱 먹을 만한 음식만 몇 종류 내놓는다. 거기 자주 갔었다. 아마 그때 사진을 찍었다면 제일 행복한 표정이 나왔을 법했겠다. 남편이 사직을 하고 둘째가 아프게 태어나면서 나는 끝도 없이 내려가게 준비된 에스켈레이트에 오르게 되었다.
나는 불행 앞에서 제일 먼저 했던 게 미국사람처럼 군 것 같다. 뉴스에 보면 불타는 집을 보며 우리가 미국사람이라 부르는 외국사람은 덤덤하게 바라보고 있고 국내뉴스에는 당사자들이 아이고아이고 땅을 굴렀다고 기억이 된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잘 못 했다. 감지된 만큼 불안을 표시하고 감당 못할 공포에 소리를 질러야 했었다. 제대로 울었어야 하고 제대로 바닥을 뒹굴며 느꼈어야 했다. 매 번 자격지심을 항변하느라 힘을 소진했고 어쨌든 나는 잘 못 했고 세월을 아끼지 못했다. 돌아보니 그렇다는 말이다.내 얼굴을 그렸더니 이렇게 그려져서 살짝 놀랬다. 신기하다. 그때 거의 저 얼굴로 살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