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까지 먹으려고 담은 김치를 너무많이 먹어 버려 어제 다시 장을봤다. 늘 가는 마트에계속 열무하고 단배추 더미가 쌓이는 걸보고 김치 담을 때구나 싶어 나도 담았는데 늦여름 입맛을 돋우면서 밥 먹기가 훨씬 수월하다. 김치는 쉽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쩐 일인지 이 번엔 쉽게 절이고 잘 주물고 간도 고민 안 하고 소금을 쳐서 맞췄다. 살짝 절인 김치거리에고춧가루풀고 풀물국물은 자박하게 잡았다.푸릇푸릇한 채소에 빨간 색깔이 물들어 맛깔스럽게 보였다. 올해 부쩍 이 맛에 빠져든다.
물김치는익으면 그 특유의맛으로 입맛을잡아주고 익지 않았을 때도먹을 수 있고신선한식감을 즐기게 하는 귀한 반찬이다.갓 담아 반나절을 보낸 김치는 설 익은 단배추에서 나오는 풋내와 짭짤한 국물이어우러져 그때만 맛볼 수 있는 싱그러운 맛이나는데 그 맛을나는어른의맛이라 부른다.맛있음과 맛없음 사이에서 약간 기우는 듯 하나 놓칠 수 없는 맛의 영역이 있어서 어른들이 말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맛의 지점 말이다. 고기반찬이 없는 식사는 대화가 좀 줄긴 해도 먹어지지만 국물이 없는 밥상은 가슴이 팎팎하고 우울하다. 이럴 때 물김치만 있어도맛이 있는 촉촉한 식사가 되는 데 늘 떨어지지 않고 있으면 좋겠지만그게 김치가 계절을 타는음식이라 떨어질 때가 많다. 어지간한 요리는 따라 흉내 낼 수 있는나도김치는어렵다. 그런데 작년부터 내가 조금 과감해진 후 김치가 제 맛을내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맛을 위해 조합할 줄 알게 됐는데 재료를 더하거나 뺄 줄 알게 된 것이고, 주인장이 담대해지니 재료들이 알아서 항복하는 느낌이랄까김치 맛이 제대로 나왔다.여기에아마 내가 모르고 살아온비밀이 있는 것 같다. 김치와 사람의 나이에 무슨 관계가 있나 보다. 아니면 성품과 관련되어 있으려나. 혹시 태도의 문제인가. 김치맛의 비결은 솜씨이겠지만 알고 보면 그 솜씨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같다. 시어머니가담그시던 김치가 편안하고 담백했던 게아마 이런 마음으로 하셨던 거 아닐까. 친정 엄마도 이러셨을 것 같다.
그런 거 안 해도 돼.
그거 없어도 괜찮아.
(넉넉한 손아구의 위력으로 휘어잡으며)
요즘 레시피 참 복잡더라.
그냥 자꾸 해봐 별거 아니야.
간 만 맞으면 돼.
겁을 왜 내 그게 뭐라고.
밥 먹을 때 국물이 있어야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마른밥이 넘어가나.
내가 나이가 더 들면 마음이 바뀌겠지 마음이 바뀌면 말 투가 바뀌겠지 그러고 김치는 좀 더 제맛이 나겠지. 그런데 나는... 김치가 좀 덜 맛있는 이때에서 맛이 농익는 그때로 서둘러 가고 싶지는 않다. 이쯤에서 미적거리려 한다. 어른의 맛을 아는 정도쯤에서 말이다.덜 익은 국물김치 맛을 아는 여기쯤에서 명절 밥상이 촉촉하고 넉넉해지도록 약간 더 마음을 쓰면서한동안 머물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