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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리나 Sep 03. 2024

국물김치

촉촉하고 넉넉한 이름

추석까지 먹으려고 담은 김치를  너무 많이 먹어 버려 어제 다시 장을 다. 늘 가는 마트에 계속 열무하고 단배추 더미가 쌓이는 걸 보고 김치 담을 때구나 싶어 나도 담았는데 늦여름 입맛을 돋우면서  밥 먹기가 훨씬 수월하다.  김치는 쉽지 않다 생각해 왔는데 어쩐 일인지  이 번엔  쉽게 절이고 잘 주물고 간도 고민 안 하고 소금을 쳐서 맞췄다. 살짝 절인  김치거리에 고춧가루 풀고 풀물국물은  자박하게  잡았다. 푸릇푸릇한 채소에 빨간 색깔이 물들어 맛깔스럽게 보였다. 올해 부쩍 이 맛에 빠져든다.

 물김치는 익으면 그 특유의 맛으로 입맛을 잡아주고  익지 않았을 때도 먹을 수 있고 신선한 식감을  즐기게  하는 귀한 반찬이다. 갓 담아 반나절을 보낸 김치는 설 은  단배추에서 나오는 풋내와 짭짤한 국물이 어우러져 그때만 맛볼 수 있는 싱그러운 맛 는데 그 맛을 나는 어른의 맛이라 부른다.  맛있음과 맛없음 사이에서 약간 기우는 듯 하나 놓칠 수 없는 맛의 영역이 있어서  어른들이 말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맛의 지점 말이다. 고기반찬이 없는 식사는  대화가 좀 줄긴 해도 먹어지지만 국물이 없는  밥상은  가슴이 팎팎하고 우울하다.  이럴 때 물김치만 있어도 맛이 있는 촉촉한 식사가 되는 데  늘 떨어지지 않고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김치가 계절을 타는 음식이라 떨어질 때가 많다. 어지간한 요리는 따라 흉내 낼 수 있는 나도 김치는 어렵다. 그런데 작년부터 내가 조금 과감해진 후 김치가 제 맛을 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맛을 위해 조합할 줄 알게 됐는데 재료를 더하거나 뺄 줄 알게 된 것이고, 주인장이 담대해지니 재료들이  알아서  항복하는 느낌이랄까 김치 맛이 제대로 나왔다. 여기에 아마 내가 모르고 살아온 비밀이 있는 것 같다. 김치와 사람의 나이에 무슨 관계가 있나 보다. 아니면 성품과 관련되어 있으려나. 혹시 태도의 문제인가.  김치맛의 비결은  솜씨이겠지만 알고 보면 그 솜씨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같다. 시어머니 담그시던 김치가 편안하고 담백했던 게 아마 이런 마음으로 하셨던 거 아닐까. 친정 엄마도 이러셨을 것 같다. 


그런 거 안 해도 돼.

그거 없어도 괜찮아.

(넉넉한 손아구위력으로  휘어잡으며)

요즘 레시피 참 복잡더라.

그냥 자꾸 해봐 별거 아니야.

간 만 맞으면 돼.

겁을 왜 내 그게 뭐라고.

 밥 먹을 때 국물이 있어야 밥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마른밥이 넘어가.


내가 나이가 더 들면 마음이 바뀌겠지 마음이 바뀌면 말 투가 바뀌겠지 그러고 김치는 좀 더 제 맛이 나겠지. 그런데 나는...  김치가 좀 덜 맛있는 이때에서 맛이 농익는 그때로 서둘러 가고 싶지는 않다. 이쯤에서 미적거리려 한다. 어른의 맛을 아는 정도쯤에서 말이다. 덜 익은 국물김치 맛을 아는 여기쯤에서 명절 밥상이 촉촉하고 넉넉해지도록 약간 더 마음쓰면서 한동안  머물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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