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라디오에서 흐르는 한 곡의 가사가 귀에 들어왔다. 평상시에도 들었던 노래건만 그날은 새삼스러웠다. 가사의 의미가 곱씹어졌다.
'한 사람만 사랑하게 해 주소서'로 시작하는 알리의 「서약」이었다.
알리 특유의 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탓에 내 가슴도 일렁였다. 가슴 속으로 가사가 파고들었다. 마치 지난 시간의 결혼생활처럼.
'그대만을 사랑하다 죽으렵니다'란 가사는 결기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때문에 잠시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기쁨일까?
사랑받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족히 그럴 만하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어떤 이의 사랑은 시작할 때도 끝낼 때도 쉽지 않다. 때로는 아프기까지 하다. 그래서 두 순간 모두 두려워한다. 망설이고 주저해 이루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사랑은 누구에겐 풀기 매우 어려운 숙제 같다. 이별은 사랑보다 난이도가 더 있어 보인다. 난이도에 따라 문제 풀이가 다르듯 결혼생활도 갈수록 난이도가 높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친정 부모님은 60년 정도 함께 사셨다.
친정엄마가 소천하시고 3년만에 아버지도 아내 곁으로 가셨다. 먼저 아내를 떠나 보낸 아버지와 약 3년 동안 나는 조금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10년 간 치매와 파킨슨 환자로 사신 엄마로 자유롭지 못했던 아버지의 시간을 되찾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일을 함께 할 때면 아버지는 어린 아이마냥 즐거워하셨다. 마치 아버지가 내 아들처럼 어려진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도 아버지를 모시고 간 잊을 수 없는 장소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쇼핑몰인 스타필드 안에 있는 별마당도서관이다. 누가 이렇게 엄청난 도서관을 만들었자며 어떻게 책을 저 꼭대기까지 올려 두었는지 아이처럼 신기해하며 질문 연속이었다. 또 하나의 장소는 강의차 들린 전북 전주에 있던 호텔이다. 돌아가시기 전 년도였다. 언니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왔다.
한옥마을을 거쳐 호텔에 가는 동안 아버지의 컨디션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버진 두 딸과 호텔 객실에 들어서면서 놀란 표정을 보였다. 특히, 하얀 시트가 깔린 트윈 침대와 테라스가 있는 것을 보고 연신 '이렇게 좋은 곳을 내가 다 와 보다니?'라며 두리번 거리셨다. 5성급 호텔도 아니데도 말이다.
너무 좋아하시는 표정때문에 언니와 나는 그동안 하지 못한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함을 느꼈다. 엄마의 사랑은 주로 아버지께 따듯한 밥상을 차려 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노동자의 삶을 살아 온 아흔 살의 아버지는 이런 장소에 와 본 적이 없었다. 낯설법도 했지만 아버진 신문물을 경험하듯 두 딸에게 죽어도 여환이 없다는 말까지 하셨다.
부부끼리 여행다운 곳에 간 적이 거의 없이 나이 들어 버린 탓이다. 그래도 딸의 눈에 두 분은 사랑하며 사셨다. 어찌 살면서 두 분이라고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두 분은 생을 다하는 날까지 함께 보내셨다. 그 부분이 쉽지 않다는 것을 결혼 20년을 넘기면서 깨달았다. 주변의 친구들을 봐도 그렇고, 갑작스럽게 사별한 언니를 보면 더 그랬다.
연인에서 부부가 되는 과정과 시간은 커플마다 다르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끝까지 부부로 살아가는 일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특히, 초혼과 기혼 커플, 신혼과 황혼이혼마저 늘어난 시대이니 부부로 긴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미혼이라 구분하지 말고 자발적 비혼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래서 부부로 산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르겠다.
부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쉽게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랑은 지키고 참아야 할 것이 많아 보인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아지는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알리의 목소리로 울려퍼지는 '숨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이란 부분은 축복인 것 같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니, 엄마보단 아버지가 축복받은 셈이다. 엄마가 숨을 다하는 날까지 곁에 계셨으니까.
얼마 전,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의 아들 이지호씨의 해군 장교 임관식이 뉴스로 전해졌다. 이혼한 사이인 아내 임세령과의 만남을 화제로 삼았다. 그들도 군대에 아들을 보낸 평범한 부부와 별만 다르지 않았을텐데도 말이다.
지인인 K도 입대한 아들이 5주 훈련을 마쳤다며 수료식에 참석한 이야기를 했다. 작년에 이혼했지만 남편도 함께 그곳에 있었다. 각자 아들이 있는 부대에 도착했고, 올 때도 따로 왔다. 하지만 아들 앞에선 부모로 나란히 기념촬영도 하고 식사도 했다며 불편한 마음보단 아들에게만 집중했다고 전했다. 일화를 전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되레 차분했다.
결혼할 때 그들 역시 서약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커플이 그러하듯이.
서약의 노랫말처럼 서로에게 마지막 사랑하는 그대이길 바라면서.
살다보니 처음과 달리 어느 순간 헤어질 결심에 이르게 된 점은 아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홀가분했을 것이고.
이혼한 부부도 사랑이 없었던 건 아니다. 특히,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이혼 후에도 변함없는 예가 많다. K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부모로서 나란히 아들의 임관이나 자대 배치를 위해 축하하러 갔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대와 같이 늙어갈 수 있다면'이란 가사처럼 결혼하면 부부는 평범한 일상을 그린다. 즉, 아이를 낳고 키우는 부부의 삶을.
자녀가 태어나면 부부 중심에서 잠시 자녀로 이동하는 시기가 생긴다. 하지만 자녀가 성인이 되면 또다시 신혼기처럼 부부 중심의 시기로 되돌아 온다. 보통 중년기 이후에 해당된다. 이 역시 평범한 일 중 하나다.
평범하게 가족이 되어 밥을 해 먹고 살아가는 일상의 연속이 결혼생활이다. 그렇게 서로 사랑을 하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평범이 더 이상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부부는 자신에게 집중하기 쉽다. 특히, 함께 있어도 외로운 사람이라면 상대에 대한 실망으로 이별을 떠올릴 수 있다. 이별은 그렇게 서서히 다가올 수 있다. 신뢰 상실의 단초는 저마다 다르다. 서약했던 기억이 남아 있더라도.
이혼한 커플이 혹시 세월이 흐른 뒤에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사랑을 복원해야 할까? 만약, 경솔하거나 잘못된 선택이라 여겨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흔들릴 수도 있지만 다시 커플이 되면 비슷한 일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당시엔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 것이기에 잇지 않는 편이 낫다.
시간이 지나면 보통의 사람들은 아팠던 기억을 희미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 의식적으로 희미하게 처리했을 수도 있다.
종종 어른들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상상을 한다. 과거를 추억이란 이름으로 저장해 두고 가끔씩 꺼내본다. 힘들었던 순간마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은 희석해서 저장했기 때문이다. 다시 소환할 수 있는 이유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나 온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이유는 생존 본능에 가깝다.
결혼 후 얼마만에 이혼했든지 상관없이 그 과정은 대부분 아프다. 아름다운 이혼은 없다. 사랑을 시작할 때 영원을 약속했더라도 이혼이 불가피한 예도 있다. 서약했던 기억조차 또렷하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랑은 서로를 자신의 삶으로 초대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혼이란 무엇일까? 함께 했던 삶에서 일부는 반드시 지워버리고 상대를 이후로 자기 삶에서 의식적으로 빼 버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혼을 선택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혼한 이유만큼 제각각일 것 같다.
알리가 노래하듯 다시 태어난대도 상대를 만나 사랑하면 좋겠다고 말하는 커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지고 볶더라도 한평생 잘 살길 바라면서 인내한다.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누구나 처음엔 그런 사랑을 꿈꾸기 마련이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는 순간까지.
설령, 그런 서약을 하지 않더라도 사랑했던 기억만큼은 지우지 않아도 좋다. 사랑했던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사랑조차 시작하지 않은 것보단 낫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누구에게나.
꽃이 피고 지듯 어떤 사랑도 피고 진다. 지고 난 뒤에 다른 사랑을 찾아 새로운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그대로 시들어 버린 채 살아가기도 한다. 무엇을 선택했든 사랑은 누구나 기대하고 싶은 욕망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사랑의 욕망이 너무 크면 누군가에겐 이별이 찾아오면 그 사랑이 부질없게 느껴질 것이다. 반대로 추구할 욕망마저 억누르고 살다보면 사랑의 꽃을 한 번도 피우지 못한다. 시작조차 못한채 쓸쓸하게 보낼 수도 있는데 아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누군가는 사랑 찾아 모험처럼 떠나고, 또다른 이는 그 사랑이 힘들어 이별을 선택한다.
사랑과 이별, 결혼과 이혼!
부부의 숙명같은 시간이다.
결혼과 이혼 모두 두렵과 아프지만 사랑이란 울타리에서 이루어진다.
사랑이 어느 날 홀연히 찾아 왔듯이 이별도 누군가에겐 조용히 다가올 수도 있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노래하기 어렵다. 만약, 이혼같은 이별이 싫다면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상대에게 알리가 노래하듯 죽어가도록 사랑해 보라.
점점 날이 추워지고 있다.
눈도 곧 내릴 것이라고 전해진다. 곧 얼음마저 꽁꽁 얼 것이다.
이렇게 추워지면 혼자 보단 둘이 좋다. 시린 손을 마주 잡아 주는 이가 있다면 그 마음은 한결 따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