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having 03화

#손목시계

02_문신 같은 시계_202403

by HoA

13년이란 시간은 짧지 않다. 서른한 살 새색시가 마흔넷의 아주머니가 되는 동안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달라졌지만 내 손목 위의 작은 기계는 변함없이 나와 함께했다. 남들 하는 건 다 하는 게 맞다는 시어른의 지론과 그 시절 결혼 풍속에 따라 몇 세트의 예물을 받았다. 장신구와 거리가 먼 나의 취향에 더해 어린아이들 키우면서 몸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차츰 들어내다 보니 시계 하나 빼고는 보석함을 통째로 대여금고에 맡기게 됐다.

효용이 없는 물건은 잘 사지 않는 소비습관과 맞물려 이 시계는 문신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사시사철 내 손목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시간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아마도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을 죄악시하고 약속장소에 항상 이 삼십 분 전에 도착해 있어야만 안심하는 엄마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기준이 느슨해졌지만 나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엄격하던 시절에는 ‘시간’을 ‘약속’과 동일시해서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 혹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이라 단정하기도 했다. 20분 이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법도 없었다. 휴대폰이 상용화되고 나서 ‘나 조금 늦을 것 같아’라는 문자로 어느새 지각이라는 무례가 쉽게 양해의 대상이 되었다. 정작 약속된 시간에 정확히 만나는 것이 점차 당연한 것이 아닌 경우도 많아졌다. 시간 개념에 예민했던 나로서는 아주 불편한 진보의 산물이라는 이유로‘휴대폰이 낳은 태만함’에 상당한 불만을 가졌던 시기도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예민함이 인생에 크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사람에게 부여된 시각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시간이 갖는 의미와 밀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고 일부러 스스로의 평안을 위해 조금 무디어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20분 일찍 시작했어야 할 일을 일부러 늦추었다. 그렇게 해야 서로 다른 속도로 인해 커져만 가는 괴리와 갈등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 스스로 타협한 결과, 지금은 5분 정도 빨리 가도록 손목시계를 조정해 두는 것으로 나만의 시간을 세팅했다.


올해 초 있었던 대학원 졸업식에서 어느 스타트업 대표가 축사를 했는데 상당한 울림이 있었다. 온전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창업을 하고 나서 어느 한순간도 나태했던 적이 없다. 나를 포함한 창립멤버 모두가 쉼 없이 일을 했다. 어떤 특별한 전략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시대가 격변하다 보니 특정한 전략을 고수하는 것이 그다지 유효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놓지 않았던 것은 실수는 하되 실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수는 깨달음을 남기지만 놓쳐버린 기회는 좀처럼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실낱 같은 기회도 반드시 붙잡으려고 그리고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여기까지 왔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사람들 사이에서 노력이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대가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실력을 갈고 벼르고 있다가 기회의 순간을 잘 포착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로 성패가 갈린다.
나도 지난 시간 꽤 열심히는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진 적도 있었고 애를 써서 잡은 적도 있었고 놓친 적도 물론 많았다. 하지만 놓친 기회는 대부분 나중에야 그 사건이 기회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 미리 포기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상당한 수준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의외로 그들이 가치를 모두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꽤 잘 나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랄 때가 많다. 사람들은 이런 부류를 보고 정치를 잘했다고 하거나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폄훼하기도 하지만 내 생각엔 그 사람들은 기회를 잡을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아야 맞다. 평범한 수준의 아이템, 무난한 수준의 보고서라 할지라도 그것이 필요한 환경, 효과를 제대로 발휘할 타이밍을 알아채는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밤낮을 고민하고 심혈을 기울이고도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사장된 아이템, 그저 그런 수준의 완성도에도 어느새 중요한 이슈가 되어버린 아이템의 차이점은 결국 조직 혹은 상사의 필요와 얼마나‘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졌는가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일 자체에 집중하느라 에너지를 필요 이상으로 써버린 지친 소가 된 것 같은 마음으로 왜 조직이 나의 열심과 이 완성도를 알아주지 않느냐며 억울해했던 세월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끼는 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후배들이 그런 억울한 상황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부서원들에게 일을 배정할 때 납기의 중요성을 가장 강조한다. “회사에서 하는 일 대부분은 자장면 배달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 신속 정확이 핵심이거든. 그런데 정확은 십중팔구 맞추기 어려워. 정확도를 맞추는 건 내가 봐줄 테니까 80점짜리 85점으로 만들려고 허송세월 하지 말고 약속된 시간 내에 아웃풋을 내는데 집중하자. 설령 완벽한 아웃풋이라도 타이밍을 놓치는 건 상사 입장에선 안 한 거랑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더라. 그리고 생각보다 80점짜리랑 85점짜리가 내 입장에서는 다른 것 같지만 큰 맥락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경우도 많아. 100점짜리로 만들어야 하는 일은 내가 미리 이야기해 줄 거야”

아마도 부서원들은 팀장이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 그런 거라고, 그래서 참 피곤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기도 하다. 다만 그들이 기울인 노력과 에너지가 이왕이면 제때 전달되어 그에 상응하는 인정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먼저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이런 바람도 욕심일 뿐, 20년 직장인으로 살아보니 대부분 이런 깨달음은 아주 늦게, 그 사람이 더 이상 함께하지 않아 힘든 기억은 희미하고 청춘의 기억만 선명해질 무렵에나 찾아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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