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having 02화

#텀블러

01_소소한 자기만족_202402

by HoA

텀블러를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되었다.

회사에 나오면 아침 점심 두 잔의 커피를 마신다. 아침은 각성을 위해, 점심은 사교 혹은 전투 목적으로 마시다 보니 한잔은 부족하고 세잔은 부대끼는 하루 두 잔의 루틴이 만들어졌다.

텀블러를 쓰기 전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일회용기를 쓰면서도 왠지 모를 약간의 찜찜함을 느꼈다. 파란불이 깜박깜박하는 횡단보도를 잽싸게 건너는 도중에 빨간 불로 바뀌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텀블러 사용에 수반되는 귀찮음을 감내할 의욕은 없었기 때문에 일회용 컵에 종이 슬리브를 끼우지 않는 정도의 지극히 소극적인,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혼자만의 환경보호를 했다. 내 손바닥은 몇 분간의 냉기와 열기를 견뎌낼 수 있을 정도는 단련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는 영 성에 차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지만 하루 두 잔의 커피를 대신할 만한 대체 에너지를 찾지 못했고 텀블러를 사용해야겠다는 결기도 도무지 생겨나질 않았다. 어쩌면 텀블러를 사용하게 되었을 때 당면하게 될 불편함이 그 다짐을 방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많은 사람들이 씻기 귀찮음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과는 달리 내가 느끼는 저항감은 2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우선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주머니에 휴대폰 하나만 넣고 홀가분하게 나서면 되는데 굳이 한 시간 정도 빈 통을 손에 들고 다녀야 하는 거추장스러움이 싫었다. 안 쓸 때는 압축이 되고 쓸 때만 펼쳐지는 아주 옛날 사람들이 약수터에 갈 때 쓰던 자바라 물통 같은 텀블러를 누군가 만들어 주길 바랐다. 비슷한 실리콘 컵이 판매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조만간 비슷한 기능을 하는 텀블러도 만들어질 거라 기대했지만 결국 그런 것은 아무도 만들지 않았다.

나머지 이유는 텅 빈 채로 사소하지 않은 공간을 차지하는 텀블러의 존재가 식사 후에 커피를 꼭 마시고야 말겠다는 암묵적 의사표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지금은 내가 점심을 살 때가 훨씬 많지만 예전에는 반 이상 선배가 사주는 점심 식사였기 때문에 '밥 먹고 커피도 마셔야죠?'라고 대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텀블러의 의미가 좀 부담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질없고 한심한 이유인데 여하간 그 당시엔 그런 핑곗거리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몇 해 전에 면접관을 하면서 선발한 신입 사원과 점심 약속을 하게 됐는데 그 친구가 텀블러를 가지고 나왔다. "예쁜 텀블러 가지고 다니네? 참 대단하다. 마음만 있지 안 하게 되던데"라고 얘기했더니 "저도 처음엔 유난스러워 보이는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는데 저희 부서에는 텀블러 쓰시는 분이 몇 분 더 계세요. 그래서 탕비실에 공용 세제도 두고요, 어느새 습관이 돼서 좋아요."라고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내가 뽑은 그녀와 그 손에 들린 텀블러가 유난히 반짝여 보였다.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에서 고객 초대 세미나를 하기 위해 판촉물을 주문할 일이 생겼다. 몇 가지 후보 안이 있었지만 텀블러가 좋겠다고 강하게 어필해서 몇 백 개를 제작했다. 이왕이면 버리기 아까울 만한 괜찮은 브랜드였으면 좋겠다는 팀원들 의견이 모여 파스텔톤의 스탠리 텀블러가 선정되었다. 그 표면에는 적당히 소소한 사이즈의 로고가 애매한 위치에 희끄무레한 색깔로 새겨졌다. 이왕이면 회사 브랜드를 눈에 확 띄게 각인하자는 임원의 뜻에 겉으로는 순응하면서도 속으로는 거부했던 담당자의 입장을 드러내는 듯했다.

어찌 됐든 그날 이후 나는 브랜드 홍보, ESG 실천이라는 명분과 소소한 자기만족까지 알차게 담은 그 텀블러를 거의 매일 들고 다녔다. 일 년 내내 무채색인 나의 드레스 코드와 상당히 대비되는 핑크색 텀블러는 칙칙한 혈색에 생기를 불어넣는 붉은 립스틱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던 겨울 어느 날 부사장님과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고 텀블러에 관심을 가지시기에 그간의 히스토리를 말씀드렸다. 그분께서는 "너는 그런 귀한 게 있으면 나는 생각이 안 나더나? 너만 이쁜 거 갖고 말이지 서운하다."라고 농을 던지셨고 나는 질세라 "판촉비가 넉넉하지 않아서 제작을 조금밖에 못했지만 부사장님이 들고 다니시면 서비스 홍보효과가 있을 테니 협찬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몇 개 가져다 드렸다. 이듬해 그 부사장님은 사장님이 되셨고 우리 회사는 ESG 경영의 실천 과제로 텀블러 쓰기 캠페인을 진행했다. 부서장은 경영 회의 때 텀블러를 지참하자는 게 암묵적 룰이 되었고, 회사 카페는 리유저블 용기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회사 전 층에 텀블러 세척기가 설치되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내 주변에는 텀블러를 사용하는 직원들이 눈에 띄게 늘었고 리유저블 빨대나 텀블러 주머니처럼 친환경 아이템 정보를 공유하는 긍정적 문화가 생기기도 했다. 함께 일하는 후배 한 명은 내 텀블러에 꼭 맞는 사이즈의 주머니를 손뜨개로 만들어주어서 크게 감동한 적도 있었다. 머리도 워낙 좋고 야무진 일처리가 내 맘에 꼭 들어 아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데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듯한 태도로 복잡한 마음을 갖게 했던 친구였는데 정성이 깃든 그 선물이 그간의 경계를 허물어주었다. 그날 이후 그 주머니는 내 텀블러와 세트로 커피 타임이면 내 손에 달랑달랑 들려 외출을 한다.

나는 오랫동안 나 이외 어떤 대상에 크게 애착을 갖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관심사가 자주 바뀌고,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큰 미련도 없고,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 돈이나 에너지를 쓰는 것을 피곤하고 부질없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텀블러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이렇게 할 말이 많은 것을 보면 내가 물건에 애착이 영 없는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나와 인연이 되어 오랜 시간 함께한 물건에 대해서는 일종의 의리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할까? 손잡이 달린 텀블러, 산뜻한 색감으로 눈길을 끄는 텀블러, 긴 스트랩이 달려 있어 어디든 편하게 메고 나갈 수 있는 텀블러로 갈아타고 싶다는 생각이 간혹 들 때도 있지만 선뜻 살 수가 없다. 최근에 미국에서 모든 것이 전소한 화재 현장에서도 스탠리 텀블러는 멀쩡했다는 사실이 이슈가 되었다. 어느새 나와 3년을 함께 한 이 핑크색 텀블러는 의리와 애정으로 어쩌면 앞으로도 수십 년 함께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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