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_오피스 다이어리 No20.
나의 하루는 다이어리로 시작한다. 출근하자마자 사무용 다이어리에 오늘 해야 할 일을 한 줄 한 줄 나열한다. 출퇴근 길이나 산책할 때, 책을 읽다가 불현듯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카톡으로 내게 메시징 해두고 그중 중요하거나 시급한 일을 골라 오늘의 업무 란에 키워드 중심으로 적어두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네다섯 개의 소제목이 요약되는데 어제까지 미처 끝내지 못했던 일을 누적하면 예닐곱 개 가까이 되기도 한다.
대개는 아이젠하워 박스에 따라 업무에 우선순위(긴급하고 중요한 것 -> 긴급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 여유 있지만 중요한 것 -> 여유 있고 중요하지 않은 것)를 정하고 처리한다. 빨리 해치울 수 있는 것부터 처리하고 줄을 죽 그어서 완료 표기를 하는 것은 업무 효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인가 성취했다는 기분을 빨리 느끼고 나면 업무 진행에 탄력을 받아 다음 일도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침부터 난제를 해결하려 들면 교통정체구간에 접어든 자동차와 같은 꼴이 되게 마련이다.
매일의 업무를 하다 보면 때로는 모두 마치고 산뜻한 마음으로 퇴근할 때도 있지만 몇 개 남겨둔 채 찜찜한 상태로 몇 날 며칠을 보내기도 한다. 남아 있는 목록은 내일의 다이어리에 반복적으로 소환되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완료되지 않는 것들은 대개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일이거나 영향도가 적은 일,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이어서 미제 사건처럼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거나 폐기처리 한다. 가끔은 그런 서랍 속의 일들이 경영진 회의에서 갑자기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어 누군가 해야 하는 일로 진화하는 상황이 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역시, 내 촉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며 우선순위를 높여 착수한다.
지난해 어느 날 팀원 자리에 가서 보고서 관련한 피드백을 하다 보니 그 친구도 나와 같은 루틴을 원노트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걸 보는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내가 그 친구를 아끼고 좋아한 이유가 사람 사이의 애정보다는 나와 같은 업무 습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일처리 방식이 비슷하거나 서로 보완이 되어 업무 코드가 잘 맞는다는 것은 사람 자체가 가진 기질이나 역량보다 직장생활에 있어서는 더 큰 영향을 발휘한다. 회사란 결국 함께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고, 이왕이면 상급자가 알아봐 주어야 일 잘한다고 정의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나와 그녀의 다른 상황에 대한 인식이었다. 나의 업무 리스트는 스스로 부여한 일이 대부분인 것과는 달리 그녀의 리스트는 주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팀이 작던 크던 내게 주어진 리더라는 포지션이 엄청난 특권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큰 틀에서의 목표는 회사가 부여하지만 그 일을 달성해 내기 위한 방향성과 방법론을 선택함에 있어 특정한 사람이 의사결정의 핵심이 된다는 것은 그와 관련된 여러 직원들의 행동양식을 좌우한다는 의미다. 그 당시 나는 불안했고 마음이 급했다. 빨리 아웃풋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어쩌면 많은 일들을 팀의 것이 아닌 나의 것으로 만들었고 아직 미숙한 그들에겐 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랬기에 그들이 빨리 일을 배웠겠지만 그 일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방식이 지속되면 어느 수준까지는 빨리 도달해도 최상의 수준에 도착하기까지 오래 걸리거나 혹은 영원히 못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제야 반추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다지 순종적인 사람이 아니다. 매사 삐딱한 유형의 사람은 아니지만 관습이나 관행에 대한 의심을 해보는 사람인 것이다. 당연한 것은 따르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해 본다. 아마도 이런 태도는 부모님의 교육 방식 때문일 것이다. 자라오면서 부모님은 내게 늘 선택권을 주셨다. 삶이 길지 않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유로이 하되 과정이 정당하고 스스로 결과에 책임질 줄 알면 되는 것이라고 얘기해 주셨었다. 7살에 유치원을 그만두고 주산학원에 간 것도, 피아노 학원에서 실습은 하지 않고 이론만 배우는 특이한 학생이었던 것도, 생물학을 공부하다가 갑자기 통계로 선회한 것도 오롯이 내 선택이었다. 그 시절 시대를 과하게 앞선 진보적인 교육 방침 때문에 금융사라는 보수적 조직문화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사춘기 아이들처럼 아직도 투쟁과 갈등을 지속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사가 시키는 것만 정확히 해가면 되는데 자꾸 내 생각을 보태서 "네가 뭘 알아?"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면을 높이 평가해서 대화를 통해 그 일을 해결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식을 찾게 하고 온전한 나의 일로 받아들이게 하는 임원도 계셨다.
나는 그렇게 '발칙함'과 '남다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힘들지만 재미있는 모험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관료제 기업에서 생존할 수 있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바로 남이 시킨 일을 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물론 회사는 연구조직이 아니므로 대주제 자체는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세부 계획과 방식이 결정되지 않은 한 상급자가 알기 전에 먼저 생각해 내서 나의 계획을 그의 머릿속에 프레이밍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회사에서 맡는 포지션은 다행히 전문적인 영역이거나 신규 사업이어서 극소수만이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에 임원이 나의 일에 대한 어떠한 관념을 갖기 전에 내가 생각하는 방향을 정의하고 계획을 세워서 보고하고 동의를 구했다. 그렇게 일하면 느닷없이 주어지는 일을 해야 하는 괴로움이 줄고
내 일에 대한 그립감이 훨씬 강해진다. 내가 주도한 일이고 그래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해내고 책임져야 하는 일이 된다. 이 전략의 가장 좋은 점은 도통 가망성 없는 일을 억지로 맡아 끌고 가야 할 괴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끔 후배들에게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어볼 때가 있다. 대개는 ‘하고 싶은 것은 딱히 없지만 시키면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겠다’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답을 한다. 하지만 소수는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본인의 일이 이러했으면 좋겠다거나, 어떤 영역으로 커리어를 확장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물론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시키는 것도 못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바보 같은 회사는 없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올라간다는 것의 의미는 역할에 맞게 미션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 강해지면 타인과 가끔은 생각이 달라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관점의 이동과 타인에 대한 이해, 그리고 갈등에서 비롯된 조율과 개선이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생각해 보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남이 준 일을 해내야만 하는 부속품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99번 잘하다가 한 두 번 실수를 하면 무능한 실패자로 낙인찍힌다. 그래서 내가 해야 일이 내가 생각해 낸 일일 때 자유도가 훨씬 높아진다.
올해 회사에서 받은 다이어리는 스무 번째 업무용 다이어리다.
지난 스무 해는 상사가 시킨 일 100퍼센트에서 내가 만들어낸 일의 비중을 조금씩 늘려가는 세월이었다.
해가 갈수록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보다는 압박감이 커졌지만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더 가열차게 하는 것이 주어진 일을 적당히 해내는 것보다는 내게 더 맞는 방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도 나 스스로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다이어리에 적어 내려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이,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