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having 06화

#좋아하는 것을 모은다는 것

05_샤프 콜렉팅

by HoA

집에는 필기도구가 많다.

아이 둘이 있는 데다 특히나 큰 아이가 샤프 수집에 푹 빠진 탓이다.

나는 샤프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이 말에 의하면 브랜드, 기능, 질량, 소재, 무게중심의 위치, 색상, 샤프심 종류에 따라 특장점도 가격도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스테들러 헥사고날은 고무도장마감의 6각 연필모양으로 밀착감을 느낄 수 있고, 로트링 800은 무게가 27.3g으로 일반적인 샤프보다 세 배 무겁지만 중심이 아래에 있어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LAMY 2000 마크롤론 중에는 카보네이트라는 신소재로 만들어진 것이 있는데 인체공학적 설계에 심미성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아이가 모은 수십 개 샤프 하나하나의 서사를 듣고 있자면 어릴 적부터 그냥 당연히 존재하던 제도 샤프 하나도 꽤나 특별한 사물이 된다.

학교에서 별일 없었는지, 요즘 뭐 배우는지, 힘든 일은 없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괜찮다’, ‘별일 없다’는 단답으로 돌려 막기를 하는 아들이 샤프 얘기만 나오면 쇼호스트라도 된 듯 신이 나서 쉴 새 없이 특징을 읊는다. 친구들끼리 물물교환을 하기도 하고 용돈을 모아 갖고 싶었던 모델을 사는 걸 보면서 먼 나라 이야기 같던 ‘덕후’의 세계가 사실상 가까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수집과정을 지켜보면서 무엇인가를 모은다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겐 크나큰 유희이자 동기 부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가끔은 적정선이 어디인가 고민할 때도 있지만 샤프 덕분에 개발 괴발 기어 다니던 지렁이 글씨들이 정돈되었다는 점, 수학을 풀 때 식을 가지런히 쓰기 시작했다는 긍정적인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소극적 지지세력이 되어주고 있다.

나는 살면서 무엇을 수집했던 적은 없지만 필기구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들처럼 특징을 공부해 가면서까지 모은 것은 아니지만 필기구에 대한 확고한 취향이 있었고 특히나 학창 시절엔 시험을 본 후 새 필기구를 사서 깨끗한 노트에 첫 자를 쓰며 마음가짐을 새로 하는 습관이 있었다. 면발이 얇은 국수를 좋아하듯 펜촉도 가는 것이 나았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마찰력이 있어 미끌미끌하지 않은 펜을 좋아했다.

회사에서 난데없이 인도네시아 법인에 파견을 나가 3개월 정도 고생하다 온 적이 있었는데 귀국 편에 스스로에게 선물한 것도 볼펜이었다. 명품 가방이나 지갑이 될 수도 있었던 보상품이 몽블랑 볼펜이었던 것이다. 내 경우는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들의 취미는 어쩌면 내게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혹은 행위이든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의 세대는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뭐든 그저 열심히 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이 우수하다고 평가받기 쉬운 시대를 살았다. 나름의 성취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새 책임이 생겼고 그만할 용기도 사례도 부족하니 어정쩡한 마음으로 지속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나 역시 성취가 기쁨이었지 성과와 상관없이 과정 자체를 즐겼던 기억은 별로 없다. 과정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이해하게 된 삶의 태도이긴 하지만 실천은 또 다른 일이다. 아마도 잘하는 것에 집중하거나, 혹은 가능한 것을 선택하는 것에는 꽤나 단련이 되었지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연습을 하는데 소홀했던 탓이다.

다행히 아들은 샤프를 모으면서 참 즐거워 보인다. 자기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기계의 신비, 세밀한 차이를 공부하고 손으로 직접 느끼면서 느끼는 쾌감, 차곡차곡 컬렉션을 완성해 나가면서 느끼는 성취감이 꽤 쏠쏠할 것이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한심한 ‘덕후’ 무리에 내 아들이 가세한 일일지 모르나 반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걱정이 줄어든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이 나와 맞지 않는지 알아가는 기회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좋은 것은 확실히 즐기고 싫은 것에 바르게 대응하는 것은 갑자기 생기는 능력이 아니라 경험으로 쌓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행위의 축적이다. 경험이든 돈이든 체력이든 에너지를 모으고 유지하고 이어가는 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기쁨이 텅 빈 어떤 일을 사명과 책임만으로 지속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참아내기로 버티기엔 수명이 과하게 길어져 버렸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선택했다기보다는 하다 보니 좋아진 쪽이다. 30대까지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으려고 고뇌하고 방황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내가 나의 일을 좋아하고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사랑이란 감정이 어찌 좋은 순간만 있겠느냐’ 하면서 스트레스 40과 즐거움 60을 섞어 열심히 하는 것이 내 스타일인 것이다. 조금 늦긴 했어도 내가 일에 대해 갖는 감정이 결국 ‘좋아함’의 한 유형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다행이다. 그래서 요즘은 변화하는 시대에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지속하고 확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또한 어쩌다 좋아서 푹 빠질만한 일을 발견하게 되면 덤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좋아하는 것이 먼저든 스며드는 것이 먼저든 순서는 별 상관이 없다. 그저 하는 일에 애정을 가질 수 있다면 큰 행운일 것이다. 나와 내 아이들이 이왕이면 신나는 일들을 모으고 연결하면서 소소한 보람을 느끼고 성취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