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having 07화

#도서관

06_마음 편히 쉬며 놀며

by HoA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이면 우리 가족은 도서관에 간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반면, 독서를 좋아하시던 엄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부터 서양미술사진첩까지 온갖 책을 전집으로 사주셨는데 초등학교 때 그나마 읽었던 책은 뤼팡과 홈즈가 나오는 추리소설뿐이었다. 수학 문제를 풀면 하나 더 풀었지 책은 그다지 내게 흥미를 불어 일으키지 못했다.


책이 재밌어지기 시작한 것은 다른 아이들이 입시 때문에 독서를 그만두기 시작하던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학교에는 도서관이 있었는데 책벌레 친구를 따라가서 한 두권 읽기 시작한 것이 그만 재미가 붙어버렸다. 입시에 목숨을 건 학교였던 터라 자율 학습시간에 문제집 안 풀고 책을 읽으면 벌을 받는 곳이었다. 금지된 것이 더 자극적인 법, 아마도 반항심리 때문에 책 읽는 재미가 증폭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고1 때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을 읽으며 마음속에 이상한 불길이 일었고 최명희의 혼불, 박경리의 토지를 읽으면서 작가의 위대함을 알았다.

정작 대학생이 되어서는 학생이면서 학생노릇을 하지 않고 성인이면서 여전한 청소년기의 미숙함을 가지고 물 위에 둥둥 떠있는 위태로운 종이배처럼 우울에 젖어 허송세월을 하다 도피하듯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배정받은 부서는 론영업팀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단 부서였다. 카드회사에 그런 부서가 있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알고 보니 카드사는 생각보다 아주 다양한 업무를 하는 곳이었고 특히 내가 배정받은 부서는 회사의 캐시카우 격인 대출 상품을 만들고 마케팅하는 곳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곳엔 금융회사에서 보기 힘든 재미난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는데 다행한 것은 그중 다수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거였다. 특히 팀장님은 어린 내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책을 많이 사주셨다. 특히, 폴크루그먼이나 토머스 프리드먼의 경제학 서적을 많이 추천해 주셨는데 통계학과 나온 내가 다소 무식해 보였거나, 아니면 똑똑한 줄 착각하시고 본인이 관심 갖는 분야의 어려운 책을 권하셨던 것 같다. 아직도 갖고 있는 복잡계 경제학 같은 책은 아마도 이번 생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여하간 대학 생활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도망치듯 입사했던 나는 의외로 회사가 맞았다. 똑똑한 듯 이상한 사람들이 한창 놀고 떠들다가 갑자기 불붙어서 새벽까지 일하고 술 마시고 또 일하고 책 보고 공부한 대로 만들어내던 시절이었다. 책 보고 배운 대로 금융실험을 하던 그때 책이란 게 꽤 쓸모가 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책에서 무엇을 배우든, 내 아이디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어떻게든 그 안에서 찾아내 명분을 만들어내든 책이란 건 근사한 문물이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책을 많이 읽지 못한다. 회사에서도 다루어야 할 주제가 다양해졌고, 아이가 둘이나 되고, 신경 써야 할 관계들이 많아지면서 책에 오롯이 집중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읽은 내용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낯은 익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얼굴처럼 책도 인상만을 남기고 스쳐 지나가는 인연처럼 허무해질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주는 안심, 위안, 힌트, 공감, 경험 따위의 가치는 해를 거듭할수록 대단하게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되도록이면 자주 도서관에 데려가려고 애쓴다.


아들은 나를 좀 닮았다. 책 읽기에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필요한 부분만 쏙쏙 발췌독하는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아이다. 비문학은 읽지만 문학은 영 이해하지 못한다. 속이 상하지만 누굴 탓할 수는 없다. 그저 언젠가 스스로 책의 맛을 느끼기를 바라며 도서관에 그냥 데려간다. 요즘은 열람실에서 숙제를 할 때가 더 많지만 도서관 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긴다. 둘째는 다행히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할 일 없으면 책을 본다는 아이가 있다는 걸 인터넷에서나 봤는데 딸아이는 독서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할 일 없으면 책을 읽는다. 그래서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가서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책을 빌려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각자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는 동안은 마음에 행복이 차오르는 시간이다.

나는 도서관에 가면 책을 볼 때도 있지만 대부분 딴짓을 한다. 서가를 한 바퀴 둘러보며 이런 책도 있구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이런 주제의 책이 왜 이렇게 많은가 궁금해하면서 제목만 훑는 것도 꽤 괜찮은 공부다. 읽을수록 스트레스가 쌓이는 뉴스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인 것이다. 서가를 돌며 맡는 종이책 특유의 안정한 냄새, 적당한 정적, 새 책과 묵은 책의 편안한 조합 역시 마음을 놓이게 하는 힘이 있다.


딸아이에게 도서관에 가면 어떤 마음이 드느냐고 물었다. 한참 대답이 없더니 "아쉬워요."라고 대답했다. 이유를 물으니 책을 아주 많이 읽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남겨두고 와야 하니 아쉽단다. 같은 질문에 아들은 빙글 대며 "따분해요."라고 말했다. 엄마가 원하는 답을 할 줄 아는 딸과 엄마처럼 솔직한 아들, 그 곁에 내가 밖에서 어슬렁거리든, 딴청을 피우든, 삼매에 들어 다른 세계에 빠져 있든 상관없이 조용히 책을 읽으며 아이들을 케어하는 남편과 함께 가는 도서관은 우리 가족에게 일상의 행복이 깃든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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