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너머의 예술
조니아이브, 디자인 뒤에 숨은 철학
조니 아이브는 애플의 아이코닉한 디자인 뒤에 늘 철학이 숨어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기능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이 존재해야 하는지, 어떤 문제를 해결할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제품의 형태나 색상이 아니라,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데 있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만들기란 단순한 제조가 아니라, 의도를 담아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든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대단한 재능은 없지만, 내가 만든 것들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길 바란다. 그것이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자, 스킬만 익힌 개발자와 내가 구분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파이썬의 대중화와 학습 콘텐츠의 확산으로 누구나 "모델러"를 자처한다. 테크니션은 이제 흔해졌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모델이 풀고자 하는 문제와 그 뒤에 숨은 의도다. 성능 지표를 내세우며 모델 브리핑을 하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절은 끝났다. "정확도 99%"라는 숫자보다, "이 모델이 실생활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진짜 모델러다.
모델은 누구나 만들지만, 의미는 깊은 사유가 만든다
좋은 모델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사용자가 직접 모델을 개발해 볼 것을 추천한다. 알고리즘 활용 능력이야 기술자가 나을 수 있어도 모델에 대한 필요성과 갈급함은 활용하는 사용자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직접 활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적어도 모델러가 사용자 마음과 동기화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의료진을 위한 진단 모델이라면, "False Negative를 줄이는 것"이 단순한 메트릭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일임을 이해해야 한다. 금융 모델이라면, "매출 증가 효과"뿐 아니라 "기존 시스템이 놓치던 리스크"를 어떻게 포착했는지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 알고리즘 선택부터 운영 전략까지, 모든 결정에는 "왜"가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코드를 복사해 붙인 AI의 하수인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때때로 타인이 만든 모델의 구매자가 될 때도 있다. 예전에는 효과 분석을 해보고 성능을 따져보았다면 지금은 "누가 만들었는가"도 알아본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도, 제작자의 철학이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복제품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모델의 효익이 반감했을 때 이를 모니터링하고 개선할 의지가 있는 개발자인지, 본인이 만들어낸 것에 얼마나 애정을 느끼고 있는지까지 볼 필요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조니 아이브의 디자인이 단순히 심미성을 넘어 애플의 정체성이 된 것처럼, 기술도 창조자의 신념이 담길 때 가치가 생긴다. 샘 알트먼이 최근 그의 회사를 65억 달러에 산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고작 50여 명 규모의 디자인 회사를 어마어마한 가치로 평가한 것은 단지 기술이 아닌 철학에 대한 투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법
머지않은 미래에 AI는 대부분의 생산활동을 대체할 것이다. 하지만 AI가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성과 의미 부여다. 어쩌면 그 또한 대체 가능할지 모르지만 아마도 더디거나 추월당하기 직전에 그 영역은 인간 본연의 권역으로 남겨두자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일을 하고,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에 여전한 행복을 느끼는 존재라면 이제는 무엇인가를 만들기 전에 깊은 사유를 할 필요가 있다. 코드 한 줄에도, 데이터 한 포인트에도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스며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은 기술을 넘어 예술이 세계로 편입된다. 우리가 행하는 기술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아마도 그 안에 우리의 철학을 녹이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