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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건 아픈 거고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다

by HoA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 마주친 두 번의 낙상


올해 시아버지는 두 번이나 낙상하셨다. 첫 번째는 겨울 끝자락이었다. 어깨뼈와 대퇴부 골절로 입원하셨고 큰 수술을 두 차례 하셨다. 두 달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겨우 퇴원하자마자, 두 번째 사고가 일어났다. 미처 회복이 되지 않은 몸을 움직이시다가 고관절이 크게 파열됐다. 의사는 “다시 걸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의사의 말이 낙담스러웠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여겨질 만큼 사태는 심각했다.

이 가운데 정작 환자 본인은 담담했다. 다시 걸을 수 있으리라 확신에 찬 시아버지의 변함없는 태도가 다행스러우면서도 혹여나 나중에 낙심하지 않으실까 염려가 되었지만 '걱정'은 내 몫이 아니라는 식의 초월적 태도가 가끔씩 신기했다.

남편과 나는 퇴근길에 자주 병원을 찾았다. 시아버지는 늘 새로운 먹거리를 좋아하시기에 신상 디저트를 사서 갔다. 주말이면 도시락을 싸서 아이들과 함께 가기도 했다. 오랜 병원 생활 중 입맛을 잃지 않는 것도 큰 복이고, 갈 때마다 반가워하시는 것도, 시답잖은 농담에 웃어주시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아버님, 오늘은 몇 걸음 걸으셨어요?”
"보조기구에 매달려서 세네 걸음 걸었나? 내일은 다섯 걸음이 목표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좌절의 기색이 없는 시아버지의 모습에 병원이 딱히 우울한 장소가 아님을, 오래 편찮으셔도 늘 씩씩한 아버님처럼 사는 게 고단해도 그냥 별일 아닌 듯 여길 수 있는 여유를 우리 부부도 조금씩 배운다.

아픈 건 아픈 거지만, 맛있는 건 또 맛있는 거니까 그때그때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누리면 되는 것이다. 고통이 나의 즐거움을 잠식하도록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른 전후까지 나는 실패하는 법을 잘 몰랐다. 아니, 상처가 나면 존재 이유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민하고 까탈스러웠다. 내 결핍, 열등함을 포함하여 예측 가능한 모든 불행을 현재로 끌어들여 미리 괴로워할 때가 많았다. 대체로 괜찮았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불안이 행복을 방해하는 날들이었다. 닥치지 않은 불행을 상상하다 보면 현실에 닿지 않았음에도 나는 이미 벙커로 깊숙이 밀려들어가 있었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물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로 왜 미리 지쳐 있어? 설사 그런 일이 생겨도 우리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일 텐데.” 그때는 그 말이 공허한 위로 같아 보였지만 자꾸 반복해서 듣다 보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고 그렇게 십수 년 단련되다 보니 이제는 쓸데없는 고민이 많이 줄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는 태생적 버릇을 버릴 수는 없었지만

비관적 상상을 키우지는 않게 되었다. 대신에 위험을 대비하거나 사고에 대처하는 능력이 쌓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때때로 좋은 일이다.


사람은 살다 보면 피하기 어려운 사고나 불행을 노출되게 마련이다. 이것은 불가항력이다. 다만, 고통과 괴로움은 사실 '선택지'라는 것을 시아버지를 통해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아픔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누구에게나 교통사고처럼 닥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괴로움’은 다르다. 시아버지는 침대 위에서 진통제를 맞는 동시에 맛있는 음식을 즐기셨다. “아픈 건 어쩔 수 없고, 맛있는 건 맛있잖아.” 그 한마디는 고통과 기쁨이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과거의 나는 문제가 찾아올 때마다 ‘괴로움’을 패키지처럼 껴안았다. 문제는 내가 껴안는 순간, 점점 더 확대 해석되고 강화되곤 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문제라는 녀석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조용히 앉아 흘러가는 것을 지켜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존재고, 머물러 있어도 가만히 두면 제 풀에 무너지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벙커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젊을수록, 치열할수록, 영리할수록 더 그렇다. 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사항이라는 진실을 알게 되면 인생이 한결 가벼워진다. 어차피 벌어진 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수습하는 것은 내 몫이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겪어낼 수도 있다. 아픈 시간은 반드시 사라진다. 잘 견디면 추억이 되고, 못 견뎌도 교훈이 된다. 시간이 흐르면 놀랄 만큼 가볍고 희미해지고, 먼 훗날 이야깃거리가 된다.

그러니, 크고 작은 아픔이 스스로를 잠식하게 두지 말자. 아픈 중에도 세상의 재미난 일에 웃고 맛있는 것은 즐기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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