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비 오는 날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만장굴 탐험을 나섰다. (현재 만장굴은 2023년 말부터 2025년 8월 31일까지 내부 점검으로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만장굴은 화산 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용암 동굴인데, 제주 말로 '아주 깊다'는 의미에서 '만쟁이거머리굴'로 불려 왔다고 한다. 그즈음, 아이가 화산과 용암, 마그마에 큰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화산 활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만장굴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고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제주 도서관에서 빌린 그림책에서 만장굴에 박쥐가 살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 터라, 만장굴에 가면 박쥐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이의 기대를 키워주며 그곳을 찾아갔다.
만장굴 탐험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용암이 꿈틀거리는 듯한 바위벽은 멋졌지만, 미끄럽고 울퉁불퉁한 바닥은 걷기가 힘들었다. 나는 아이가 미끄러져 넘어질까 봐 바닥을 연신 살폈다. 동굴 안을 걷다 보니 아이는 금세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집에서 가져온 손전등으로 아이의 흥미를 돋우어 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배터리 가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미한 불빛 밖에 못 내는 손전등에 아이는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는 다시 다리가 아프다며 업어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만장굴의 끝에 다다랐다. 박쥐는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 뭔가 더 가야 클라이막스일 것 같은데 벌써 끝이었다. 아니, 더 들어갔으면 돌아올 때 아이를 업고 와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발밑을 조심하며 만장굴을 다시 돌아 나오고 보니, 안경이 습기로 뿌예졌다. 온몸이 축축한 것이, 비닐하우스 온실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만장굴 밖으로 나와 평평한 땅에 서 보니, 다리가 꽤 피곤했다. 다행히 비는 많이 그친 상태였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느냐 마냐의 기로에 섰다. 그러나 내일이면 아내가 돌아간다는 생각에 우리는 다시 한번 힘을 냈다.
우리가 선택한 다음 목적지는 비자림이었다. 비자림은 500-800년 된 비자나무들이 빼곡한 숲이다. 탐방로에는 화산송이가 깔려 있고, 이끼와 울창한 나무들이 멋진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지난 제주 여행에서는 사려니숲을 걸었기에, 이번에는 비자림을 걷기로 했다.
비자림에 도착할 때 즈음 비는 완전히 그쳤다. 우리는 우비를 차에 놔두고 비자림 입구에 들어섰다. 어느새 해가 쨍 나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비가 온 직후의 향긋한 숲내음을 맡으며 우리는 비자림을 걷기 시작했다. 비자림에는 벼락 맞은 나무가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아이에게 곤충과 개미들을 찾아 찾아보자고 했으나, 희한하게도 비자림에서는 곤충과 벌레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 흔한 개미조차 마음먹고 찾으려고 하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아이는 얼마 걷지도 않아, 또 업어달라고 졸라댔다. 아내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이를 업었다. 이것이 모성애인가.
그리고 그렇게 오전 오후를 쉼 없이 걷고 나자, 체력부실 부부는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일정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전 오후 쉴 틈 없는 일정이었기에, 저녁은 여유 있게 보내기로 했다. 우리 세 사람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동네 산책을 나왔다. 이곳 세화는, 특히 세화 해변은 산책할 맛 나는 곳이었다. 도로는 시끄럽지 않고 조용했고, 파도 소리가 듣기 좋게 '쏴아아 쏴아아' 하고 계속해서 들려왔다.
저녁 시간이 되어, 사위가 점차 어두워졌다. 도로 주변 가게들의 조명이 어두운 길을 밝게 비췄다. 아내와 아이, 그리고 나는 서로 손을 잡고 기분 좋게 해변가 옆 인도를 걸었다. 그러다 문득 해변가에서 한창 드론을 조종 중인 남자분을 보게 되었다. 혼자 여행을 온 분인지, 드론을 가지고 해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며 관심을 끌고 있었다. 드론을 하늘로 띄웠다가 갑자기 해변 모래사장으로 내려오게 했다가 반복했다.
우리 아이는 하늘을 나는 드론이 신기했던지, 눈이 동그래져서는 드론을 조종하고 있는 분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러기를 잠시여. 드론 주인 분이 기웃거리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도 해볼래?? 할 수 있어! 쉬워!“
선뜻 드론을 조종해 볼 수 있게 해 주겠다며, 아이를 손짓하며 불렀다. 아이는 엄마 아빠 눈치를 슬쩍 보았다. 엄마 아빠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냉큼 달려가서 아저씨 앞에 섰다. 평소 낯가림이 심하던 아인데, 그런 낯가림도 호기심을 이기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드론 주인분은 아이를 앞에 세우고, 양손으로 아이의 손을 감싸며, 조종 리모컨을 같이 잡아줬다. 아이는 긴장이 됐는지 살짝 얼어 있었지만, 뒤에서 인상 좋은 아저씨가 계속해서 독려하자, 엄지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그 뒤에서 흐뭇하게 아이를 지켜보았다.
드론 주인분은 아이의 손을 함께 잡고, 계속해서 조종법을 가르쳐 주셨다. 손가락을 위로 움직여 드론을 하늘 높이 날게 했다가, 다시 또 손가락을 아래로 움직여 드론을 땅으로 내려오게 했다. 왼쪽 오른쪽 신나게 드론이 날아댔다. 그러기를 잠시여. 마침내 아이 손에서 본인 손을 떼고, "이제 너 혼자 조종해 보라"며 큰 인심을 쓰셨다.
그러나 손을 놓기가 무섭게, 수직으로 낙하하는 드론. 내 입에서 "어...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드론 주인분도 당황하셨던지, 황급하게 아이 손을 다시 감싸며, 드론을 수직 하강에서 수평 활강으로 이동시켰다.
다행히 바닥에 추락할 뻔한 드론은, 원 주인의 조종으로, 다시 멋지게 하늘을 날아올랐다. 다행이었다. 초면에 큰 실례를 할 뻔했다. 아마 이 분도 철렁 하셨겠지. 그렇게 아이는 제주에서 생애 처음으로, 드론을 조종해 보는 경험을 해보게 되었다.
나는 아이가 기대하지 않았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뜻밖의 경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신기하고, 감사했다. 여행 중에 낯선 사람을 만나고, 선뜻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조건 없는 호의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했다. 여행의 즐거움이란 멋진 관광지를 다니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과정 속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우연을 경험하는 것이었기에.
오늘 만장굴이나 비자림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더 좋았던 건, 이처럼 평범한 저녁 안에서의 특별한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