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마음속으로 매일 스스로를 탓했다.
우리의 안일함이 아이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게 될까 봐.
제주 한 달 살기 여행의 3일 차, 우리는 오름을 오르기로 했다. 어린아이도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오름을 검색한 끝에, "백약이 오름"을 찾아 도전에 나섰다. 그런데 오전만 해도 화창한 날씨였건만, 갑자기 하늘이 흐려졌고, 오름 근처에 도착하자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겉옷을 걸치면 덥고, 벗으면 바람 때문에 춥고, 감기 걸리기 쉬운 날씨에, 앞으로 긴 기간을 아이와 단둘이 함께 해야 할 아빠의 마음은 영 불안했다.
셋이서 웃으며 오름 오르는 계단을 성큼성큼, 아이는 나무 계단, 계단마다 벌레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아내는 내일모레면 남편과 아이를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짠 한지, 아쉬운 심경의 말을 한마디씩 내뱉었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나는 영 이 바람이 신경 쓰였다.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우리 아이는 평소 감기에 쉽게 걸리곤 했다. 간절기와 겨울마다, 맞벌이 부부는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며칠 후면 아이와 단둘이, 근처에 병원도 없는 제주의 끝에서 지내야만 한다는 사실에, 나는 벌써부터 신경이 곤두섰다. 아이와 둘이 긴 여행을 하는 것쯤 문제없다고 큰 소리를 쳐댔지만, 막상 둘이 남게 되려니까 불안했다.
곧잘 걷는 것 같더니만, 산 중반 즈음, 아이는 못 걷겠다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늘상 하던 레파토리 외침이 나온다.
"업어줘!"
날도 춥고, 바람도 심하게 불고, 곧 헤어질 아련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내가 아이를 업었다. 계단 오르막이라 힘들게 분명한데도 선뜻 아이에게 등을 내주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힘이 떨어진 아내를 대신해, 이번엔 내가 아이를 업었다. 따뜻했다. 아이는 나를 바람막이로, 나는 아이를 따뜻한 등난로로. 같이 의지하며 가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리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연인의 속삭임보다 더 앙증맞은 언어들로,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오름을 올랐다. 다만, 아이를 업은 팔과 다리에 힘이 빠질 때 쯤, 사랑은 잠시 일시정지가 되었다. 등에 업혀 있던 아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이제껏 업혀 왔음에도, 다리 가 아파서 못 걷겠다며 자리에 다시금 주저앉았다. 이렇게 서고 걷고 업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더니, 어느새 산 정상 직전이었다.
날아갈 것 같은 바람에, 아이를 더는 데리고 올라가기 힘들었고, 우리는 이 정도면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었다고 서로를 칭찬해 주며 만족했다. 아내는 조금 아쉬웠는지 혼자 조금 더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산 정상은 바람이 너무 세다고, 이 정도가 적당하다며 아이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우리의 사랑만은 완벽한 날이었다고 생각했다.
오름을 내려올 때 아이가 자꾸만 흙 묻은 손으로 코 아래를 비볐다. 나는 더러운 손으로 입과 코 주위를 만지면 병균이 들어갈 수 있다며, 자꾸만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바람이 워낙 셌기에, 오름에 내려와서 차에 탔는데도 몸이 추워서 덜덜 떨렸다. 우리는 가까운 칼국수집으로 가 몸을 덥히고 배를 채우기로 했다. 그리고 칼국수집 마룻바닥에 앉아 따뜻한 칼국수를 먹는데, 아이의 코 아래 인중 부분이 검붉어진 게 보였다.
'어이구, 그러니까 자꾸 비비지 말라니까...'
그때만 해도, 흙 묻은 손으로 자꾸 비벼대 상처가 났나 보다 했다. 아빠 말을 안 들어 마앍은 얼굴에 검붉은 흔적이 생긴 게 영 못마땅했다. 또 한편으로는 아이가 아플까 안쓰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큰일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다음날이 되자 아이의 코 아래 부분이 조금 더 빠알개져 올라왔다. '왜 이러지?'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금방 괜찮아지겠지 하고 말았다. 어차피 일요일에 여는 피부과를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일이면 아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정이라, 일단은 여행에 집중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장굴과 비자림을 즐겁게 다녀왔다.
문제는 그 다음날부터였다. 아내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아이와 둘만의 생존 여행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난 아이의 얼굴이 이상했다. 코와 입 주변뿐 아니라, 볼과 눈 밑 여기저기, 아이의 얼굴에 검붉은 흔적들이 짙게 생겨났다. 마치 무언가에 크게 쓸린 마냥, 얼굴 전체가 군데군데 거뭇거뭇했다. 좋게 보면 고양이나 호랑이였고, 안 좋게 보면 어딘가 많이 아파 보였다.
급히 피부과를 검색했다. 제주도는 피부과가 제주시와 서귀포에만 있었다. 제주 맘카페 후기들을 검색하며 전문의가 있는 피부과로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세화에서 제주시 노형동까지 아이를 데리고 운전해 갔다. 그리고 겨우 도착한 피부과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을 우리에게 내려주었다.
"진단명은 자가감작성 피부염입니다. 아이가 최근 많이 무리를 하진 않았나요? 코아래에는 풀에 스쳐서 피부염이 생긴 건데, 이게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피곤한 상태가 계속돼서 얼굴 다른 부위로까지 피부염이 생겨난 것 같네요."
라는 답변을 들었다. 맙소사. 아이 얼굴이 이리된 게 엄마 아빠 때문이라니? 우리가 아이 상태도 모르고, 짧은 일정이라 이곳저곳 가보아야 한다며, 끌고 다녀서 이렇게 된 거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이야기를 집에 있는 아내에게 전하자, 아내도 말을 잃었다.
"내가 여행 계획을 무리하게 짜지 말 걸"
자책의 말만이 우리 사이에서 오갔다. 그래도 덤덤해보려 애쓰며,
"곧 나아지겠지. 피부과에서 약 처방해 줬으니 바르면 금방 나을 거야"
긍정적으로 말해보지만, 이미 내 안에서도 속상한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피부과에서는 아이가 햇빛을 자주 보는 게 좋지 않을 수 있으니, 주로 실내 생활을 하라고 했다. 자연과 함께 뛰놀게 하려고 제주도로 놀러 왔는데, 실내에만 있으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제 한 달 살기의 초입인데, 시작부터 여행이 망쳐진 느낌이었다. 속상한 마음만 가득했다.
한 달 살기 내내 아이의 얼굴은 검붉은 피부염이 더욱 심해졌다. 다시 찾은 피부과에서는 더 이상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를 필요가 없다 말했다. 이제는 시간만이 약이라고 했다. 6개월, 1년 만에 돌아올 수도 있고, 더 오래갈 수도 있다고 했다. 모자와 마스크로 햇빛으로부터 최대한 얼굴을 숨기라 했다.
이에, 처음엔 비를 핑계로 숙소에만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서는 너무나 답답했다. 이대로 숙소에만 있는 것도 답은 아니다 싶어, 모자와 마스크로 무장하고, 조금씩 관광지를 찾아다녔다.
아이의 맨 얼굴을 처음 보는 이들은 우리를 연민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빠와 아들 단둘이 다니는 것이 기특해서일지, 아이의 얼굴로 인해, 불쌍함을 느낀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친절이 가는 곳마다 가득했다. 음식점에 들어갈 때면, 다른 손님들에겐 주지 않는 김과 국, 반찬이 특별히 나왔다. 미역국 한 그릇을 시켜서 먹으면, 처음 시킨 양만큼 미역국을 리필해 주셨다. 길 가다 들어선 김밥집에서는 바나나를 간식으로 받았다. 고깃집에서는 아이랑 대신 놀아줄 테니 맘 편히 밥을 먹으라고 했다.
'이대로 평생 이렇게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으면 어쩌지?' 하고, 매일 아내와 나의 걱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나 이와 같이 뜻밖의 순간에 다가온 낯선 친절에 마음을 위로받고 말았다. 그 속에서 아이와 내가 제주 한 달 살기를 끝까지 이어나갈 힘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었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제주 한 달 살기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진료를 다시 받았다. 새로 간 피부과에서는 구글에서 '라임'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라임을 맨손으로 만진 다음, 햇빛에 피부가 노출되면, 이러한 색소침착이 발생할 수 있단다. 제주 오름을 오르며, 비슷한 성분의 수풀이 아이의 얼굴에 스치고, 햇빛을 받은 아이의 피부가 반응한 결과로 보인다고 했다. 정식 명칭은 "식물광피부염" 이라고 했다.
그랬다. 무리한 여행으로, 부모의 안일함으로 아이를 혹사시켜, 발생한 자가감작성 피부염이 아니었다. 그저 수풀과 자외선이 작용하여 피부의 색이 일부 변한 것뿐이었다. 별도의 약 없이, 6개월 정도면 원래의 피부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다행히 그 이후로 아이의 피부가 눈에 띄게 하얘지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의 마음도 하얘졌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참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