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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감나무, 그리고 아버지

by 작가서당


아버지, 집, 그리고 대봉 감나무의 추억.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살던 양옥집 앞마당에는 잔디밭과 연못이 있었다. 그 둘을 감싸는 작은 둔덕이 있었고, 그 위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자랐다. 이 대봉 감나무에 대봉이 열렸다. 익어가는 과정을 즐길 새도 없이, 어느 날 문득 나무 한가득 커다란 대봉이 눈부시게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도리깨를 거꾸로 높이 세운 것처럼 생긴 대봉 따개로 아버지께서는 늦가을 몇 날을 잡아 대봉을 따셨다. 아버지께서 참 귀하게 여기신 그 대봉은 한 그루에서 수확하는데도 양이 참 많아서 여기저기 나누어주셨다. 남은 대봉은 신문지로 한 개 한 개 잘 싸서 보관하여 한 번에 한 개씩 아버지의 후식이 되어 주었다. 아버지께서는 단감은 좋아하시지 않고 대봉만을 즐기셨는데, 우리 집 대봉 감나무에서 나는 대봉은 유난히 탐스럽고 튼실했다. 대봉을 따는 일은 아버지에게 특별했다. 그건 단순한 수확이 아니라 나무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물컹한 식감 때문이었을까, 다른 식구들은 시큰둥했다. 아버지만 대봉을 좋아하셔서 그런지 실은 가족 중에 아버지만 대봉을 즐기셨다. 나중에 호텔 레스토랑에서 얼린 대봉이 디저트로 나오는 것을 보고 그 고급스러움과 셔벗 같은 맛에 놀랐다.

대봉 감나무가 있는 그 집은 아버지의 자부심을 상징했다. 자수 성가하신 젊은 아버지는 처음에는 일본식의 사택에 사셨고 내가 5학년이 되었을 때쯤에는 커다란 한옥을 사서 이사하실 만큼 자립을 이루셨다. 처음으로 집을 소유하시게 된 아버지께서는 그 집에 긍지를 느끼셨다. 아버지께서는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퓨전 한옥’으로 집을 대대적으로 손보셨다. 일요일이면 어머니와 나들이하시며, 집을 꾸밀 소품들을 사서 들어오시곤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 집에서 집안일을 살뜰히 돌보셨고 특히 대봉 감나무를 돌보는 일이 큰 기쁨이었다. 감나무가 자라는 동안, 아버지의 시간과 정성도 함께 자라났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들이 집에 관심이 없다고 타박을 하셨지만 우리는 바쁜 대학 생활로 집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꽃을 좋아하던 나마저도 어렸을 때와는 달리 집 안에 무슨 꽃과 나무가 있는지 관심이 덜 갔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봉이 눈부시게 열리는 감나무였지만 그 또한 내 관심 밖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이사 전부터 그 나무에 특별한 관심을 두셨고 세월을 함께 거쳐 가며 아버지 삶의 일부분이 되어갔다. 아버지께 그 나무는 아버지 삶에서 성장한 무언가를 의미했다. 그런데도 내가 감나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 그 나무가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여겨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때부터인가 감나무집에 문제가 생겼다. 어머니께서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어 하시게 된 것이다. 편리한 아파트는 주부들의 로망이 되어 있었고 한국은 시나브로 아파트 공화국이 될 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연코 아파트보다는 집을 선호하셨고, 대봉 감나무집을 포기할 수 없으셨다. 어느 날 아버지와 단둘이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큰 도시에 내 집이 없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아버지께 아파트는 '집'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아파트의 꿈을 접으셨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떠나시고 우리 형제들은 대봉 감나무집도 떠나보내야 했다. 집을 떠나보내면서 감나무도 함께 떠나보내야 했다. 대봉 감나무가 끝까지 마음에 남았다. 이제 그 나무는 단순한 감나무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와의 연결을 의미하는 상징적 존재였다. 대봉 감나무만이라도 따로 남길 수 없을까 궁리하기도 했다. 새로 오시는 분께 감나무를 옮겨 심을 수 있을까 말씀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아파트에 살아 그럴 공간조차 없었다. 집과 감나무, 그리고 아버지의 기억이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다. 그 집과 함께 떠나보낸 대봉 감나무는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그 나무는 여전히 아버지의 손길과 목소리를 전해주는 나의 기억 속 나무다.


*찾아와 주시고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집과 나무, 그리고 아버지를 떠올리며 오늘의 이야기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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