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한 마지막 세계 일주, 잊지 못할 추억 여행
여행은 내게 부모님과의 추억이며, 이 글은 두 분을 기리며 쓴다. 그해 우리는 어머니의 환갑을 기념해 ‘세계 일주’를 떠났다. 김찬삼이나 한비야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 가족에게 그 여행은 진심 어린 약속이자 오래도록 가슴에 남은 여정이었다. 그즈음 한국 사회에서 ‘환갑잔치’의 의미가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예전에는 친척과 이웃을 초대해 동네잔치를 벌이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점점 여행으로 조용히 보내는 방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전 해에 환갑이셨고, 어머니는 여행한 해에 환갑을 맞으셨다. 우리 형제자매는 모두 외국에 살아 두 분의 환갑잔치를 해 드리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떠올렸다. 잔치는 못 해 드렸지만 우리 모두 함께하는 여행은 어떨까. 그 생각이 여행 계획으로 이어졌고, 결국 ‘환갑잔치 대신 세계여행’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당시 허리 디스크 수술 후유증으로 몇 달째 누워 지내고 계셨다. 거동이 어려워지셨고, 몸뿐 아니라 마음마저 많이 위축되어 계셨다. 그런 어머니께 여행 이야기를 꺼내자 어머니 눈이 반짝이셨다. “건강만 회복되면, 꼭 가자.” 어머니의 그 말씀 한마디가 회복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알았다. 당시는 우리 형제들이 모두 다른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던 때였다. 나는 미국 동부에, 언니는 중부에, 오빠는 런던에 있었다. 막내 남동생은 한국에서 직장을 알아보던 중이라 함께하지 못했다. 모두가 각자의 인생에서 바쁜 시절, 부모님과 자녀 셋이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건 기적 같은 기회였다. 우리는 서로의 생활을 포개어 시간을 맞췄고, 그 선을 따라 하나의 가족이 다시 모였다.
먼저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나를 만나러 미국 동부로 오셨다. 회복 중이시던 어머니가 긴 비행을 감내해 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에서 물안개를 가르며 배를 탔다. 그 광경은 과연 장대하고 웅장했다. 물안개 속으로 들어갈수록 마음도 풀려갔다. 어머니는 연신 “세상에, 이런 데를 내가 다 보다니…” 하셨다. 그 말 한마디에 이 여행의 의미가 다 들어 있었다. 뿌듯함과 경이, 그리고 다시 일어선 사람의 기쁨.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어머니와 나란히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 속 어머니는 병을 이겨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 후 중부로 이동해 언니와 함께 그랜드캐니언과 요세미티를 여행하셨고, 두 분만의 서부 패키지여행도 잘 다녀오셨다. 점점 더 어머니는 ‘환자’에서 ‘여행자’가 되어가고 계셨다. 여행이 건강을 되찾게 했는지, 건강이 여행을 가능하게 했는지, 지금도 그 순서를 가늠할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런던에서 가족이 모두 모였다. 부모님과 삼 남매, 그리고 조카들까지 한자리에 모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봉고차를 빌려 도버 해협을 건너고 유럽 대륙을 달리기 시작했다. 유럽 여행은 우리가 계획하며 찾아가는 2주간의 여행이었다. 파리의 에펠탑 아래를 거닐고, 루체른의 호숫가에서 민박집 아침을 함께 차려 먹었다. 여행지의 이름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그때 지었던 표정들이다. 로마, 피렌체, 잘츠부르크… 도시들의 이름은 희미해져도, 그곳에서 함께 걸었던 가족의 뒷모습, 문 앞에서 사진 찍으며 웃던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다. 돌아보면 우리는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가족이었다. 비행기표를 모으고, 경비를 아끼며 계획을 세운 그 여정은 우리 삶에서 꽤 큰 결단이 필요했던 일이었다. 아마 그 어려움이 그 시절의 여행을 더 각별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이 여행은 더욱 특별했고,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일’이었다. 우리 가족의 ‘세계 일주’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함께 보낸 소중한 공동의 추억으로 남았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마음속에 쌓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준비할 때 한 번, 떠날 때 또 한 번, 그리고 회상할 때 다시 한번 이루어진다. 그래서 회상하는 내 마음속의 세계 일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여행이 끝난 뒤, 어머니는 정말 많이 달라지셨다. 전에는 허리 통증 때문에 하루 대부분을 누워 지내셨지만 여행 이후엔 조금씩 산책하러 나가시고 동네 성당에도 나가셨다. 여행이라는 건 어디를 갔느냐보다 누구와 함께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제 그분들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때 찍은 사진 속에는 우리가 모두 함께 웃고 있다. 그 여행이 있고 7년 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 아버지는 여행 때의 비디오테이프를 자주 꺼내 보시며 화면 속 어머니의 웃음과 여행지의 햇살을 오래도록 바라보셨다. 이제는 오래된 앨범과 테이프 하나만으로 그 시절이 떠오르고 되살아난다. 함께 걸었던 시간은 지나갔지만 그 따뜻함은 여전히 마음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