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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19. 2023

한국인의 평균 식사량을 모르는 안나에게

진시황보다 더 큰 욕망의 덩어리인 미니가


 한국인의 평균 식사량을 모르는 안나에게



 시차적응을 못하고 있다니 소파나 침대에 쓰러져 누워 있을 안나가 너무나도 쉽게 그려져 안쓰러운 마음이 두 배입니다. 거기에 다가 해외에서 검진결과를 듣는다니요. 2에 제곱승입니다.


 안나가 비교적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난 늘 안나의 식사량에 대한 우려가 있답니다. 물론 모두 각자에 맞는 체중과 식사량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카타르에서 같이 일했을 당시 점심으로 블루베리 요구르트볼을 먹던 (그마저도 깨끗이 비워내지 못했던) 날을 생각하자면 비교적 건강한 삶을 꾸리고 있다는 안나의 말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워집니다.


 건강에 대해서라면 저 역시 할 말이 참 많지만 자랑하는 모양새가 될까 자제하겠습니다. 여러 고통을 지나 이제는 더 이상 제 몸을 소홀하게 여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제 신체에 대한 일들을 금세 잊어버리고 마는데요. 이 전의 기억으로 사는 건 어찌나 멍청한지요. 차라리 술을 끊겠다고 주절거리는 주정뱅이의 삶이 나아 보일 지경입니다. 전 그렇게 욕을 했으면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고통스러워하는데 주정뱅이는 적어도 술을 마시는 동안만큼은 행복하잖아요.


 최근까지도 고치지 못해 제 신경을 갉아먹고 있는 고통은 오른쪽 손목과 팔꿈치, 검지손가락의 찌릿함인데요. 2020년 오른손으로는 수저를 뜨지 못해 간신히 왼손으로 죽을 먹으며 약 1년간 여러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했었습니다. 당시 서른 중반까지는 몰라도 마흔이 넘어서도 이렇게 일할 수 없단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 업은 정말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죠. 알다시피 바쁜 시즌에 집은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업무강도가 있잖아요. 다음 해,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입국승인을 거쳐 카타르에서 만났던 것 기억하나요. 일을 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저의 다짐은 민들레 씨앗보다 연약하여 작은 모래 바람에도 금방 흩어지나 봅니다.


 일을 좋아하는 것도 이유겠지만 익숙한 선택을 반복하는 것 같아요. 상황이 개선되고 나면 환경을 바꿀 생각보다 이 전의 패턴을 바보처럼 반복하는 거죠. 그것도 아니라면 제가 덜 아팠던 걸까요. 제 몸을 아끼고 싶어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안나가 그 방법을 찾는다면 나에게도 부디 공유해 주세요.


 안나 스스로를 ‘가엽다’고 표현한 일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왜냐면 제가 약한 소리를 그렇게 많이 했어도 안나는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부정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잖아요! 자신을 흔적을 부단히 도 남기고 싶어 하는 안나가 처연했던 건가요? 곧 사라져 버릴 유한한 신체를 가진 안나가 서글펐던 건가요? 그런데 유한함을 인지하며 기록하고 싶은 욕망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그건 정말 ‘인간’이라면 자연이 발생된 감각인 걸까요? 인간의 3대 욕구처럼 모두가 필수불가결하게 창작욕을 갖고 있지 않은걸요. 변태처럼 흥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진정된 상태에서 질문 중이랍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그저 지난번에 끝맺지 못한 안나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지네요.


 일단, 윤동주 선생님은 정말 너무나도 애틋하고 굉장한 분입니다. 진짜 ‘미쳤다'는 말 외엔 어떤 경탄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저는 윤동주 문학관에 가면 항상 울고 나온답니다. 안나는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면 ‘별’이 생각나는군요? 저는 ‘부끄러움'이 생각납니다. 주입식 교육의 결과라고 해도 반박의 여지는 없지만, 이 전부터 저는 그를 떠올릴 때면 욕되어 녹이 낀 거울에 얼굴조차 비추지 못하는 우울함에 젖어듭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송구스러운 일이나 제 우울함은 그의 부끄러움과 닮아있는 모습이 있다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언어를 빌리자면 그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는데 사유는 다르겠으나 제가 잃어버린 제 ‘쓸모'에 관해서 저는 허무함과 동시에 무기력감을 느낍니다. 어떻게 보면 안나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지만 다른 아웃풋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사담으로 잠깐 나눴지만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 ‘쓸모'에 대한 고민은 내 살아생전 사람들이 나를 찾지 않게 될까 봐.라는 불안함에 파생된 생각입니다.


쓸모=가치. 사람들은 가치 있는 것을 좋아함

쓸모없음 = 가치 없음 =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음 = 아무도 찾지 않음 = 잊힘

잊힘 ≒ 존재하지 않음


 그래서 저는 더욱 쓸모 있어지길 바라요. 능력을 갖추고 제대로 된 ‘꼴'로 보이고 싶어요. 그래야 많진 않더라도 적어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저를 찾을 테니까요. 그래서 동시에 저는 불안해져요. 가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부풀려지게 보이는 것 같거든요. 사람들이 저의 모습에 실망하고 돌아서게 될까 봐 두려워요, 안나.


 안나가 나에게 보았던 단단한 외피는 이렇게도 불온전한 내면을 조금이라도 내보이지 않으려 노력한 결과물이랍니다. 지금 고작 3줄을 넘기는 이 글을 쓰면서도 저는 손끝이 차가워지고 입안이 건조해지고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징징거리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적어도 저는 그렇답니다. 그래서 쉽사리 저의 ‘진정한' 고민은 꺼내기가 어려워져요. 저는 좋은 기운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제가 만화를 보면서도 엉엉 운다는 이야기는 했었나요? (앞으로 어디까지 안나에게 부끄러운 고백을 하게 될지 감이 안 잡히네요.) <원피스>라는 만화책에서 ‘Dr. 히루루크' 에피소드는 제가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고 슬프게 울었던 장면이에요. 그는 돌팔이 의사로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실제로 제대로 된 진료를 하지 못하지만 그가 평생 연구해 오던 것이 사후에 다른 이들에 의해 백신이 개발되어 사람들을 치료하게 되죠. 악당들의 함정에 걸려 했던 말도 대단하지만 죽기 전 했던 그의 대사가 제 마음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 깊숙이 총알이 박혔을 때? 천만에!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천만에!

독버섯으로 만든 수프를 마셨을 때? 천만에!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다···

나는 사라져도 내 꿈은 이루어진다.

병든 국민들의 마음도 구원을 받게 될 거야.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나는 그래서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가 봅니다. 내가 이뤄낼 과업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내 뜻이 전파되고, 그래서 잊히지 않으려고요. 동생은 저에게 물욕이 없다며 ‘스님', ‘베짱이' 등으로 부르곤 하는데요. 사실 대대손손 전해질 문화유산을 남길 요량이었다니. 역시, 한 번 사는 인생. 저의 배포가 이 정도입니다. 당장 동생에게 제 포부를 알려야겠어요.


 추신, 그런데 제 글이 너무 난데없이 점핑하고 있는 것 같진 않나요? 일을 하고 집에 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쓰는 글이라 그런지 자꾸 번호를 매겨 정리하고 싶어 져요. 소제목 1. 안나는 바보. #2 미니가 눈물이 많은 이유. 뭐 그런 거.


 매끄럽게 글을 진행하고 싶은데 이게 저의 한계네요. 부디 너른 마음으로 내 편지를 읽어줘요.



 진시황보다 더 큰 욕망의 덩어리인 미니가








Photo l © 안나와 미니

2021년 카타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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