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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18. 2023

양말 뜨는 모글리 미니에게

시차적응 ‘대’ 실패한 안나가


 양말 뜨는 모글리 미니에게


 

 먼저, 시차적응에 ‘대’ 실패했다는 소식으로 편지를 시작해 봅니다. 어제 오후 1시부터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완전히 눈이 떠진 지금은 새벽 3시. 이전 편지에서 ‘새벽에 눈이 떠지는 날이면 그 초월적이고 신비한 상태가 좋아서 그냥 이불속에 있는다’고 허세를 부린 오만한 나를 용서하세요. 안 되는 날도 있네요. 지구 정반대 편에서 이렇게 또 하나 배웁니다. 나란 인간, 하.

 

 미국은 덥고 춥습니다. 같은 기후권에 있는 도시라 날씨도 비슷하고 한국에서 보던 똑같은 나무들이 보여서, 공항에서 숙소로 오는 동안 지방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에티오피아 출신의 택시기사 아빌이 영어로 생소한 나라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면, 깜빡 속을 뻔했을 정도였답니다. 아직 식료품을 사러 두 번 나가본 게 전부라 미니에게 전해줄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많이 없네요. 미국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나눠보도록 해요.

 

 비행기를 타기 몇 주 전에 했던 건강검진 결과지가 이메일로 왔어요. 마지막 건강검진이 제가 일본으로 외노자가 되어 떠나기 전이였으니까 4년 조금 더 된 거 같네요.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4년 전엔 특이사항이 없는 결과지를 받아봤던 것 같은데, 이번엔 이것저것 뭐가 많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장 치료해야 할 시급한 질병이 발견되거나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만, 부위 별 (부위라고 하니 왠지 모르게 고기 덩어리가 된 기분이네요.) 팔로우업을 해야 하는 리스트가 생각보다 길고 내용이 복잡해 당혹스러웠습니다.

 

 아니 사실 조금 억울했어요. 미니도 알다시피, 나의 삶의 패턴은 비교적 건강한 편이 잖아요? 착잡한 마음에 구구절절 나열해 보자면,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필라테스를 하고 한 달에 두세 번 등산을 갑니다. 담배는 피우지 않고, 술은 한 달에 와인 한두 잔 ‘내가 마시고 싶을 때’만 즐깁니다. 각종 영양제를 챙겨 먹고 있고 다행히 건강한 식단이 입에도 잘 맞아, 건강한 음식을 맛있게 즐겨 먹고 있어요. (지난 7월 미니를 박장대소하게 했던 ‘1일 1 나또’ 썰 기억하죠?) 올해 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오랜 꿈이었던 작가가 되기 위해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써 정서적/정신적으로도 평온한 편이고요. 물론 ‘작가’가 되기 위해 이것저것 노력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긴 하죠. 하지만 선천적으로 낙천적인 편이기도 하고, 회피형이라 금방 잊어버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받고 있는 스트레스조차 은근 흥분된다고요! (네 맞아요, 미니가 꿰뚫어 본 것처럼 나는 분명히 음흉한 구석이 있네요.) 아니 이 정도면 모범생 아닙니까. (나 억울해!)

 

 <흠흠, 잠시 화면조정시간 가지겠습니다. 삐 ->

 

 그러니까 그 결과지를 받았을 때 제 뇌리를 스치고 간 것은 ‘신체의 유한함’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나는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기안 84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인도의 갠지스강을 방문한 예능 프로그램을 감명 깊게 본 상태였습니다. 강 한편에서는 시체를 태운 재를 강에 흘려보내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강물로 세수를 하고 몸을 씻는 모습을 보며 그는


 “그렇게 오래 살아도 3시간이면 재가 되네. 좀 허무하네요. 3시간이면 다 타서 없어진다는 게. 별거 없네요. 인생. 참, 뭐 없다. 이렇게 보니까. 뭔가 내려놓게 된다.”

 

 라고 했어요. 14시간의 긴 비행 동안 (물론 밥 잘 먹고, 잘 자고, 사육도 잘 당했습니다!) 간간히 나는 그와 같은 표정을 하고 ‘삶과 나’에 대해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며칠 후 그 감정에 대한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받아 든 건강검진 결과지는 나로 하여금, 주변에 흐르던 느낌 정도였던 그 ‘여운’을 ‘신체의 유한함’이라는 보다 정제된, 구체적인 개념으로 인지하게 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온 마음과 정신, 몸으로 제대로 ‘인지하는 것’에 대한 나의 썰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풀어보도록 할게요.)


 그렇게 새로 인지한 ‘신체의 유한함’이라는 개념은 자연스럽게 ‘내가 왜 글을 쓰는가’라는 이유의 한 조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모든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고. 어쩌면 나는 언젠가 사라져 버릴 ‘나’에 대한 흔적을 내가 잔뜩 묻어난 ‘글’로써 남기고 싶어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나는 허무하게 잊히고 싶지 않았던 것 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나는 ‘또또’ 어쩌면 이것저것 욕심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 세계에서 무언가 단단히 한몫을 해내 보이고 싶은 귀여운 야망에 불타오르는 이중인격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제 보니 내가 30살 생일 때, 아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장기조직기증을 신청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경솔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또또또’ 어쩌면 나는 ‘장기조직기증’이라는 이름 하에 나의 흔적을 남기려 했던 것일지도 몰라요.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면서 말이죠. 물론 죽어가는 누군가를 살리는 것에 가치를 두고 진지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신청한 것도 맞지만, 지금 이 편지를 쓰며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역시 미니의 말처럼 나는 분명 어딘가 음흉합니다. 그리고 또 가엽고요.

 

 그렇다고 내가 유한한 것들에 대해 무례하거나 애정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왜냐하면 이 사색의 끝에 다다랐을 때 제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바로, 윤동주의 ‘서시’의 한 소절이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진짜 미친 거 아닙니까?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을 쓸 수 있는 거죠? 이게 지금 아름답고 우아하기만 한 게 아니잖아요. 문장을 견고히 받치고 있는, 그 밑에 촘촘히 쌓여 있는 그의 사색과 숙고를 좀 보세요. 그의 문장 앞에서 나는 정말 또 한없이 작아집니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라니 하마터면 ‘유한한 것’들에 소홀해질 뻔한 미련한 나를 구원해 주는 빛나는 문장. 윤동주 시인과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민족이라는 점에 다시 한번 무한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번 편지는 구구절절 나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것 같네요. 보시다시피 저의 뇌는 나름대로 건강하고 유쾌하면서도 음흉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니가 나에게 나쁜 질문을 권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런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면 미니에게 신호를 보낼게요. 우리 함께 노들섬에 뛰러 갑시다. 친근한 의사 선생님과의 만남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리고 사견으로는 사회(혹은 단체) 생활이 버겁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모두 어렸을 적부터 교육받은 대로 평범한 척, 괜찮은 척하고 참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제가 뚜껑을 열고 깊이 살펴봤던 사람들은(나 자신 포함) 다 지금 미니가 느끼는 비슷한 감정과 고민을 호소했었거든요.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나는 무엇보다 미니가 남들은 적응 잘하고 다 괜찮은데 ‘나는 정말 왜 이 모양인가’라는 말로 본인 스스로를 답답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나는 언젠가 독일에서 감자를 캐고 양말을 뜨고 있을 모글리, 미니의 모습을 응원하겠어요.

 

 모쪼록 나와 주고받는 편지가 미니의 ‘나를 찾는 과정’ 그러니까 미니의 단어로 말하자면 ‘나의 대한 쓸모’에 대한 답을 구체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긴 이제 해가 뜨네요. 예쁜 밤 돼요.

 


시차적응 ‘대’ 실패한 안나가








Photo l © 안나와 미니 

2021년 카타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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