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부르는 순간 사랑이 피어올랐다
오늘의 기분
아주 작은 사랑을 목격한 기분
“애옹. 애옹”
가게 뒷마당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콕 나를 집어서 부르는 것 같은 부름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게 주변을 돌아다니는 치즈냥이었다. 나를 보더니 “애용. 애용.” 두 마디를 더 울더니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고양이를 키워본 적도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물을 새로 갈아두라는 명령이었다.
가게를 오픈한 지 두 달이 될 무렵, 우리 가게 앞과 뒷마당이 길고양이들의 길목인 걸 알게 되었다. 고양이치곤 못생긴 뚱뚱한 치즈냥 한 마리, 주자창을 지나갈 때마다 우리 가게를 유심히 쳐다보는 회색 얼룩이 한 마리, 겁이 많아서 가끔 보이는 노랑이까지. 세네 마리의 길고양이들은 하나같이 뚱뚱하고 경계심이 엄청났다.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 사람들 몰래 훔쳐 먹는 음식물 쓰레기의 염분 때문에 퉁퉁 붓는 거라고 하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 지나가다는 뚱냥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시큰하다. 고양이 사료를 주문해서 아이들이 다니는 길가에 두고 싶었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른 영역이었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나는 길고양이들의 생계까지 책임질 정도로 대단한 동물 사랑이 없다. 또 주변 빌라 사람들의 반감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사료를 주기 시작하면 그건 나와 길고양이들의 약속이 되는 셈인데, 나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킬 책임감이 없었다.
좋은 사람은 되고 싶고, 책임은 지고 싶지 않은 나의 차선책은 깨끗한 물이었다.
삭막한 사막 같은 도시를 다정하고 포근한 곳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작은 한 줄기 오아시스는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길고양이들을 위한 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나의 책임감이 그렇게 뛰어나지 못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출근이 늦었다는 이유로, 손님이 왔다는 이유로 조금씩 물을 갈아주는 주기가 느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딱히 물이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아서 그만둘까 싶을 무렵, 고양이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애용. 애용.
잘 먹고 있으니 계속 갈아달라.
그 순간 마음에 없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아주 작게 피어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사랑은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알려진 아타카마 사막에 인류 역사상 첫 비가 내렸다. 황무지처럼 메말랐던 땅 위로 무수히 많은 꽃들이 핑크빛 고개를 들었다. 윤택하고 기름진 땅에서만 꽃이 피어나는 게 아니구나. 한 번의 비로 꽃밭이 되어버린 사막처럼, 초라한 마음에서도 사랑은 피어날 수 있었다.
초라한 마음들이 모여서 경이로운 사랑이 되는 걸까.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알아버린 사실은 거창한 이유와 마음이 아닌 이처럼 사사로운 마음에서도 사랑은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사랑'은 너무 숭고하고 위대한 것이라 나 같은 일개 현대 사회의 일원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하트마 간디나 오드리 헵번 같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어쩌면 높은 강도의 기준이 우리를 사랑에 박한 사람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거창한 걸 할 필요는 없다는 그런 단순한 생각이 든다. 그냥 보통날의 작은 조각을 떼어주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인생의 절반을 담보 잡을 필요도 없이 말이다. 명절을 앞두고 정신없는 기사님에게 '연휴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덕분에 소중한 택배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그 한마디가 사랑의 작은 조각이 될 수도 있고, 초등학교 횡단보도를 지날 때 신호와 상관없이 한 번 더 아이들을 살펴보는 짧은 30초 역시 사랑의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다. 동네의 길 고양이들에게 물을 주지 않더라도,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시선 또한 사랑의 시작이다.
그렇게 모인 사사로운 사랑의 조각들이 따스한 빛을 뿜어내는 그런 숭고한 사랑이 될 수 있다면, 지금 내 가슴에 피어오른 사랑을 꺼트리지 않고 싶다. '고작 그걸로 사랑이냐.' 혹은 '책임감은 버리고 허울만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야 말로 사랑의 허들을 높게 만드는 바보 같은 일이 아닐까. 삭막하고 계산적인 도시에 책임감부터 운운하며 그 누가 사랑을 시작하려 할까. 사랑은 아무리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도 단 한 방울의 빗방울로도 꽃을 피워낸다. 아주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그 시작에서 꽃은 피어난다.
정말, 사랑은 관대하다.
키만소리 (김한솔이)
2년간 남편과 세계 여행을 하다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곳 출판 스튜디오 <쓰는 하루>를 만들었다.
여행자에서 이제는 작가와 글방 에디터,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다.
제3회 브런치 출간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엄마야, 배낭 단디 메라」를 출간했다.
세계 여행하면서 받은 엄마의 메일을 엮어 「55년생 우리 엄마 현자씨」를 출간했다.
다수의 작품을 그리고 쓰며 활발히 연재 중이다.
인스타그램 @ki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