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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만소리 Mar 22. 2020

청량한 봄 햇살이 찾아와도 외투를 벗을 수 없는 3월

아득한 여정은 언젠가 끝이 난다.

 오늘의 기분

지독하게 긴 겨울이 끝날 것 같은 기분



 겨우내 움츠리며 몸살을 앓던 유칼립투스가 몰라보게 늠름해졌다. 자세히 보니 겨울바람에 눈치 보며 몸을 사리던 새순들이 어느새 어른 잎의 풍채를 띄고 있었다. 야들야들했던 줄기들은 제법 꼿꼿하게 울대에 힘이 붙었다. 고작 500g도 되지 않은 작은 땅에서 온 힘을 다해 봄이 왔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시계도 달력도 없는데 어떻게 딱딱 봄을 알아채는지. 참 기특하다.


  따스한 봄볕이 들어오는 창문 앞에 가까이 섰다. 가로수의 앙상한 가지 끝에도 저마다 기지개를 하는 새순들이 걸려있었다. 봄을 알아챈 녀석들은 우리 집 화분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봄의 분주함과 달리 거리의 계절은 겨울에 멈춰있었다. 수심 20m까지 꽁꽁 얼어버린 빙판 위를 걷는 것처럼 모든 게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다. 마스크와 장갑으로 얼굴과 손을 사라지고 어깨는 한껏 움추려졌다. 건너편에서 사람이라도 걸어오면 먼저랄 것 없이 한 걸음씩 멀어진다. 간혹 마스크를 끼지 않고 다니는 사람이라도 등장하면 찌푸려진 눈들이 매몰차게 떠다닌다. 올해 겨울은 유독 길고 외롭다. 옷깃을 아무리 세워도 마음이 춥다. 청량한 봄 햇살이 찾아와도 외투를 벗을 수 없는 3월이 슬프기만 하다. 좌절감이 계절을 덮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도, 통장잔고도, 미워하는 마음도, 이 지독하고 어려운 겨울도.


 긴 터널의 끝에는 언제나 빛이 먼저 마중을 나온다. 우리가 할 일을 터널의 끝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일일 것이다. 한 줄기의 빛도 용납되지 않는 깜깜한 암막커튼이 쳐진 길을 흔들리지 않고 걷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누군가는 뛰어갈 테고, 어떤 이는 무서움에 주저앉기도 할 테니까. 삽시간에 터널 안은 울음 소리로 가득차버린다.


그럴 땐 울음을 멈추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떼보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어둠이 자츰 익숙해지고 그 끝에서 희미한 윤곽들이 드러난다. 우리를 터널의 끝으로 안내해주는 수많은 손들. 지치지 말고 함께 가자고 끌어주는 고마운 손들. 황량한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따뜻한 손들. 괜찮다고 다독이는 다정한 손들. 


긴 터널에는 언제나 빛이 있고, 반드시 끝이 있다. 그리고 그 끝을 함께 가는 힘은 우리, 사람에게 있다. 




 지루하고 차가운 동절기를 묵묵히 견뎌내고 꽃망울을 터트리는 나무들처럼, 우리의 겨울도 언젠가 피어오르는 생명력으로 시끄러운 날이 올 것이다. 넘어진 이를 일으켜세우며, 지친 등을 안아주며 그렇게 묵묵히 걷다보면 이 지독하고 춥고 외로운 겨울도 다음 페이지를 보여줄 것이다. 이 아득한 여정은 언젠가 끝이 난다. 온전히 봄날을 즐길 수 있는 날은 분명히 온다. 


 외투를 벗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보고 싶은 당신과 눈을 맞추며 길을 걷고,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뛰어노는 아이들을 흐믓하게 바라보며 바람을 느끼는 그 날이 얼른 우리에게 찾아오길 바란다.




키만소리 (김한솔이)

2년간 남편과 세계 여행을 하다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곳 출판 스튜디오 <쓰는 하루>를 만들었다.

여행자에서 이제는 작가와 글방 에디터,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다.

제3회 브런치 출간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엄마야, 배낭 단디 메라」를 출간했다.

세계 여행하면서 받은 엄마의 메일을 엮어 「55년생 우리 엄마 현자씨」를 출간했다.

다수의 작품을 그리고 쓰며 활발히 연재 중이다.

인스타그램 @ki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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