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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l 21. 2024

다음 파도에 이르기까지

일주일에 한 번은 한 시간 일찍

오랜만에 만난 전임자 과장님이 나를 보며, 예전에 비해 내가 차분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 계속 들어보니, 처음 본인의 자리를 넘겨줄 때에 의지가 넘치고 통통 튀던 모습이 좋았는데 그새 많이 힘들었던 건지 기운이 떨어진 것 같다고. 본디 통통 튀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인데, 어떻게 통통 튀었다는 건지 기억이 안 나지만 확실한 건 요즘은 통통 보다는 퉁퉁에 가깝긴 했다. 퉁, 뾰루퉁.


각오를 하고 발령받아 온 감사실의 막내 생활이었지만, 상반기 내내 한 달의 절반을 바깥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오히려 상반기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깨달았다. 내가 생각 외로 아주 지독한 집순이였단 사실을.




오랜만에 만난 과장님에게 징징대듯 푸념을 털어놓았다. 이 자리에 나를 추천하여 그대는 떠났으니, 이 정도 푸념은 들어줄 수 있지 않습니까. 내 푸념을 들은 그가 말하길, 그가 겪었던 이곳에서의 생활은 여행이라기보단 다시 군에 입대한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퇴근 후에도 선배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출장 기간 내내 붙어 다니니 하루 일과를 마쳐도 다시 내무반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군대에 입대한 적도 없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같이 있는 선배들이 불편하고 싫어서가 아니라, 오롯이 혼자인 시간이 확보되지 않아 괴로운 것.



드디어 상반기의 출장일정들이 대부분 마무리되고, 당분간은 내근이 위주가 될 듯하다. 감사하는 일을 하니, 쉬는 날에도 누군가에게 다른 의미로 감사해야 할 일이 생긴다. 몸은 하난데, 짧게 쉬는 날을 노려 나를 찾는 이들이 있다 보니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일정에 나는 다시 휩쓸리듯 탑승한다. 나도 한 때는 계획을 하고, 누군가를 끌어들이고, 일정을 즐기고, 피드백을 받는 것을 즐겼던 사람이거늘. 짧은 시간이지만 주말도 친애하는 이들과 공유하고 쪼개다 보니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삶을 산 지 꽤나 오래되었다. 계획할 겨를은 없다.




종종 안부를 묻는 엄마 같은 선배에게 메신저로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녀도 나의 근황과 안부를 물었고, 나는 같이 푸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휩쓸리듯 끌려다니는 삶이라고 말하자 그녀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는데 놓으라고 힘주면 더 힘들다고. 잡으면 잡혀주고 흔들면 흔들리면서 리듬을 타듯 흐름에 편승해 살아보라고.


어이없게도 나는, 일전에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뒤 다른 에게 이야기하며 나 또한 삶이 흐르는 대로 잘 살아보겠다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읽어놓고도, 내가 말해놓고도, 내가 지키지 못했던, 어이없는 다짐. 나는 이 파도에 언제부터 이렇게 버티고 서 있었던 건가. 어떻게든 혼자만의 시간을,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이라도 확보하고 싶어서 꼿꼿이 버티며 상반기의 파도를 넘어왔다. 그렇게 지금은 큰 파도가 지나가고, 잠깐의 휴식기. 확실한 건 지금의 이 시간을 잘 보내야, 앞으로 다가올 파도를 어떻게 견딜지 대비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의지와 관계없는 회식이 잦았던 이번 주. 폭우가 쏟아지는 변덕 많은 날씨에 회식날엔 비를 뚫고도 회식에 가야 했다. 회식이 없는 날엔 비로 인해 차가 밀려 기숙사까지 도착하는 데에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던 날들 중에 갑자기 비가 그치고, 운 좋게 회식마저 없던 날. 한 시간 일찍 조퇴를 선언하고 기숙사로 향했다. 선배들은 발령받아 온 이곳에, 외지인인 내가 또 다른 약속이 잡혀서 일찍 간 줄 알고 있다. 약속이라면 뭐, 나 자신과의 데이트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기숙사에 일찍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고 근처 식당으로 가서 여유롭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은 근처 동네를 빙 둘러 산책을 하고. 그렇게 돌아와 기숙사에서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다. 가만히 쉬는 것도 좋지만, 내가 하고 싶은 사소한 일을 하는 것들이 꽤나 즐거웠다. 아니, 어쩌면 내 의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여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았던 걸지도.




파도에 몸을 실을지언정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은, 내 의지대로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이제 일의 유무와 관계없이 유연근무제를 쓰든 조퇴를 하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5시에 퇴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아껴둔 체력으로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파도에 몸을 실기로 한다. 잡으면 잡혀주고, 흔들면 흔들리더라도 리듬을 타려면 어느 정도 체력은 있어야 하니까.


휩쓸려가듯 사는 삶이 나쁘다, 힘들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파도를 타는 데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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