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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l 28. 2024

신호등 아래에서

파라솔 아래에서

인천에 온 지 6개월 만에, 새로운 출근길 루트를 발견했다. 그날따라 항상 가던 길로만 안내해 주던 내비게이션이 유독 고집 있게 다른 길을 주장했기에, 원래 가던 길에 무슨 사고라도 났는 건가 싶어 용기를 내 새로운 길로 향했다. 운이 좋게도 더 빠른 시간 내에 청사에 도착할 수 있었고, 나는 이 길을 놔두고 6개월간 같은 길로 얼마나 오래 고집을 피웠던 건가 한탄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전날과 다름없이 새로 알게 된 길로 향했다. 도착 예정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늘, 전날은 운이 좋았던 건지 이 날은 화물차들 사이에 끼어 가다 차선 변경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어느새 나도 모르게 고속도로 IC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망했다."를 여러 번 되뇌며, 돌아갈 길이 없는 고속도로 위 혈혈단신의 외지인은 내비게이션이 새로이 안내해 주는 길로 따라갈 수밖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과금하지 않고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있었고, 이러다 지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다행히 평소처럼 그날도 혹시나 늦을까 하는 걱정에 남들보다 항상 일찍 나왔으니까. 7시 40분에 도착하던 것을, 7시 55분에 도착한 정도.




동갑 친구들에 비해 운 좋게 일찍 취업에 성공했던 나는, 사회초년생이라는 친구들이 부러워할만한 타이틀을 일찍 달고 그들과 나의 간격이 더 멀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그들을 응원했다. 그때 뒤늦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학원까지 다니며 취업준비를 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친구가 희망했던 직종은 보통 그때 당시 우리 나이보다 더 이른 나이의 친구들이 준비하는 분야였기에, 친구는 그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해있었다. 늦은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애써 웃어 보이는 얼굴 뒤에 혼자만의 고뇌가 느껴지는 것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때 그 친구에게 응원과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편지를 써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는 다행히 희망하던 곳에 합격을 했고, 그토록 바라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나 친구가 말했다. 그때의 내 편지를 읽고 눈물이 났었다고. 그리고 굉장히 힘이 되었다고.


내가 써줬던 편지엔 그런 말이 있었다. 네가 바라는 곳에 가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단지 그곳을 목전에 두고 눈앞의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을 뿐이라고. 항상 그랬듯 빨간 불은 초록 불로 바뀌었잖아. 갈 수 없는 길이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늦어졌을 뿐. 그러니 늦어지고 있다 믿는 시간 동안 앞서간 이들이 보지 못했을 주변의 나무와 풍경을 보면서 서서히 너의 때를 기다리자고.


나의 편지가 힘이 되었다는 친구의 그 말에, 그 이후에도 이 이야기를 취업 준비에 고생하고 있는 동생들이나 승진이 조금 늦어져 걱정하고 있는 후배에게도 편지로 써주곤 했다. 내가 보기엔 어떻게든 그 경지에 도달할 사람들인데, 조급하며 불안해하는 그 마음이 안쓰러웠기에. 갈 수 있을 법한 길을 앞두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늘 그 비유를 들어 말했다. 신호등의 빨간 불.


실로 나의 이야기가 힘이 되었다 말하고, 마침내 그 길을 건너가게 된 친구. 말에는 힘이란 게 있는지, 내가 이 이야기를 건넸던 동생들과 후배들도 모두 바라던 바를 이루었다. 내가 뱉은 말이지만,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서였는지 나도 내 앞에 다소 막연하고 막막한 길이 있을 때마다 빨간색 신호등을 떠올렸다. 빨간색 신호등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기다리지 못해 돌아서려고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하면서.



다행히 고속도로에서 가까운 출구를 나와 7시 55분에 아슬아슬하게 출근도장을 찍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그날. 6개월간 고집스럽게 같은 길로 가던 나를 어이없어하던 어제와 별개로, 역시나 고집스럽게 일찍 길을 나선 스스로가 기특했다. 이제 이곳을 좀 안다고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일찍 나서기를, 습관을 유지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빨간 불이 켜져도 건너지 못할 길은 아니었음을. 그리고 빨간 불이 초록불로 바뀌는 그 간격은 그간의 습관이 길을 건널 수 있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임을. 그러고 보니, 그간 이 비유로 응원을 건넸던 친구들에게 그 길을 건너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는 근거를, 내가 지켜봐 온 그들의 습관이 주는 확신에 대해 충분히 말해주지 않았던 것 같다.


살며 세상 모든 막연한 일들을 끝내 마무리 짓고 지금에 와 있음을 잊고 살 때가 많다. 한 해도 막막하지 않은 때가 없었고, 하루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날들이 없었다. 시간의 힘을 살아가며 더더욱 느낀다. 아주 오래 전의 어느 날인가, 한 번은 부서장이 내 앞에서 말도 안 되는 할 일을 늘어놓으며 겁을 주고 있을 때에도 나는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온전히 내 힘으로 할 일이 아닐 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언젠가 저 일이 끝나 있을 때가 올 거야.' 역시나 내 생각대로 그 일은 끝났고, 나는 이제 그 일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또 어떤 빨간 불 앞에 서 있는 걸까. 또 앞으로 걸어갈 많은 길에서 얼마나 많은 신호등을 만날까. 아니, 다시금 신호등 앞에 서 있더라도 덜 초조하게, 그리고 초연하게 기다릴 수 있을까. 한 해의 절반이 가고 또 거기서 한 달이 지났다. 상반기동안 지나온 수많은 신호등 앞에서 얼마나 부자연스러웠던지. 요즘엔 횡단보도 앞에 커다란 파라솔이 펼쳐져 있는 곳도 많으니, 더운 날이지만 조금은 햇빛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차분하게 신호를 기다리고 싶다. 언젠가 건너간다, 언젠가 저곳에 가 있으리란 확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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