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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Oct 31. 2022

반짝이는 바닥을 향해

Time flies. 올해가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 놈의 시간이 이렇게나 빠른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우주에 어떤 문제(?)가 생겨 시간의 흐름이 빨라진 것은 아닐까 하는 非.. 아니, 悲합리적 의심까지 든다.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왜 시간이 빨리 흘러간 건지. 근무시간엔 일의 무게에 따라 시간이 빨리도, 천천히도 흘러갔으니 논외라 하고.

야금야금 몰래몰래 내 시간을 빼앗아간 도둑놈은 아마도 요 스마트폰인 듯했다. 손바닥만 한 것에서 나오는 강렬하고 유혹적인 것들로 나의 귀중한 밤과 주말이 사정없이, 그리고 무의미하게 낭비되었다는 게 잠정적 결론.


그러면서 반대의 것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시간이 이것밖에 안 됐다니!'라고 느끼게 했던 순간들을. 그것들을 반복하면 정말 시간이 천천히 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먼저, 공원에서의 달리기.

지난 봄부터 저녁마다 별일이 없으면 한 시간씩 공원을 걷고 있다.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요즘, 길러진 체력을 믿고 운동 막바지에 조금 달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체력이 길러지긴 개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 곡의 시간만큼도 뛰지를 못한다. 나름 학창 시절에 계주 선수도 해보고, 오래 달리기도 선두권에 있었는데. (물론 나이와 세월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숨은 죽도록 차오르는데 귀에서 들려오는 듯한 음성. '얘야- 아직 2절 후렴까지도 못 갔단다.'


두 번째, 장거리 운전. 운전을 하게 되어 좋은 점은 보고픈 이를, 가고픈 곳을 원하는 때에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초보운전은 아니지만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운전을 하려 하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지 장거리 운전을 할 때엔 긴장한 탓에 시간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마주한 이와 풍경은 늘 나에게 즐거운 변수였고 그 후 또 얼마간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곤 했다.


세 번째, 침대 머리맡에 있는 책. 세상에, 이만큼의 페이지를 읽었는데 시간이 고작 20분밖에 안 지났단다. 나 이만하면 오늘 많이 읽은 것 같은데-하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늘 책을 덮었다. 돌이켜보니 책을 사겠다고 서점 어플 속을 헤매던 시간이, 정작 책을 읽는 시간보다 더 길었다.




모든 시간이 빠르지만은 않았다. 분명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니 나는 이제 이 느리게 흐르는 시간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올해 안에는 반드시 반환점을 돌아 집에 가는 길까지 노래 한 곡을 다 들으며 달릴 것이다.

멀리서도 힘이 되는 고마운 이들, 새로운 풍경과 마주하여 한 살, 한 달, 아니 하루라도 더 어린 철없는 마음을 속절없이 공유할 것이다. 그리고 화려하지만 무의미했던 유혹들은 최대한 뒤로하고 머리맡에서 늘 내가 펼쳐주길 기다렸던, 지금의 나처럼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고민하며 써 내려간 누군가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 볼 것이다.






'알뜰주걱'이라고-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조리도구가 있는데, 이 주걱만 있으면 양념이나 소스를 그릇 바닥까지 싹싹 긁어낼 수 있다. 숟가락으로 덜어지지 않았던 것도 이걸로 긁으면 그릇 바닥이 빛날 정도로 깨끗하게 덜어져서 쓸 때마다 묘한 쾌감이 들곤 했다.


가득인 것 같았던 올해라는 그릇도 이제 바닥이 보인다. 직장인으로서 보내는, 숟가락으로 퍼가는 듯한 큰 덩어리의 시간은 내 통제 밖. 그러나 그릇 가장자리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남은 시간들은 내 소관이니, 알뜰주걱으로 깨끗하게 긁어내 보리라. 알아차리지 못한 더디지만 귀중 시간들을 틈틈이 더 찾아봐야겠다.




그렇게 노력 끝에 마침내 마주할 올해의 끝엔 조금이라도 미련이 덜 하기를.

남김없이 반짝이는 바닥이기를 바라며.

깨끗이 비워둬야, 다음 해가 더 깔끔한 맛으로 담기지 않을까.


어쩌면 다행이다.

아직 두 달의 시간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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