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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시 17분에서 25분 사이

특별함이 고유함이 되는 시간

by autumn dew

금요일. 오랜만의 오후 반차. 베란다에 박아 두었던 시든 화분을 출근하며 트렁크에 실어두었고, 퇴근하자마자 회사 근처에 줄지어 자리한 화원단지에 갔다. 꽃이든 나무든 사는 김에 사장님께 분갈이를 해달라고 할 참이었다. 때마침 어버이날을 맞아 카네이션이 진열된 화원 주변에는 손님이 많았고, 꽃보다 사철 푸른 식물을 사기로 마음먹은 나는 화원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을 사야 하나 고민하는 나에게 사장님은 천천히 보고 마음에 드는 애로 골라보라며, 다행히 뭔가 훔쳐갈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지 나를 남겨두고 화원 밖으로 나가셨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식물원에 온 것처럼 한참 동안 온실 속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두 녀석을 골랐고 사장님께 분갈이를 부탁드리며 얼마나 자주 물을 줘야 하는지를 여쭈었다.


"화분이 작기 때문에 물을 자주 줘야 해요."

내가 갖고 간 화분은 작았기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물을 주라고 하셨다. 화분이 크면 일주일에 한 번도 충분할 테니 잘 키워서 혹시 더 큰 화분으로 분갈이를 하게 되면, 그땐 그렇게 하라며.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보던 영상이 너무 재밌어서 이어보느라 저녁을 다 먹고도 한참을 앉아있었다. 영상이 끝나고 설거지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디지털시계를 바라본 순간, 시계는 20:17을 가리키고 있었다. 순간 '어? 지금 2017년이 아닌데 왜 저렇게 나오지?'하고 잠시 오독을 해버렸고, 재빨리 지금이 오후 8시 17분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저렇게 보니, 2017년 같기도 하고 1분 후면 2018년 같기도 하고, 저러다 곧 2025년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요즘처럼 날이 좋은 때엔 점심을 먹고 선배들과 청사 부지를 두 바퀴 정도 걷다 사무실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주고받는데, 어쩌다 그런 이야기가 나온 지 모르겠으나 나도 모르게 선배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다시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으세요?"하고. 모두 한 가정의 가장인 몸도 마음도 무거운 중년의 남성들이라 젊음을 갈구하여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희한하게도 전부 20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답과는 달리, 나는 다시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가끔 20대 때의 사진을 보면, 지금보다 어리숙하고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 외양에도 젊음이 가득한 것이 느껴진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 풋풋함.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것 같고, 그렇지만 또 이것을 이겨내 나가는 것이 인생의 가르침이라 느끼며 열심히 살았던 그때의 앳된 얼굴. 젊어지면 좋지 않냐고 되묻는 선배들에게, 나는 지나 온 20대의 시간들보다 더 잘 살 자신이 없어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 어리숙하던 때에도 매번 찾아온 선택의 기로에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했고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자신도,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자신도 없다고 느꼈기에. 다들 다시 20대가 되면 더 열심히 공부할 거야, 더 건강을 챙길 거야-와 같은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아뇨. 저는 그때보다 더 열심히 살고 싶지 않아요.



돌이켜보니, 10대 때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이란 온 세상의 기대와 주문이 정말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 빨리 20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20대는 내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확인받는 시간이었고, 그런 세상 앞에서 그래도 퍽 괜찮은 사람이란 걸 최선을 다해 증명하며 살아야 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될 운명이야.'에서 '세상은 나에게 평범한 사람이라 하지만, 그래도 노력한다면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야.'로의 전환. 다시 말해 10대는 특별한 '애'였고, 20대는 특별하고자 '애'썼다.


그렇게 30대가 되고 중반에 서 있는 지금은 특별함에 대한 기대도 특별함에 대한 증명도 필요 없는. 그저 나라는 고유함을 깨닫게 되어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평범하다 여기지도 않는다. 평범함은 살뜰히 살펴보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을 내 편의대로 정의 내린 일반화일지도 모르니까. 20시 25분을 향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2017년에서 2025년을 지나 온 2,30대의 나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들을 했다.


[햇볕을 모아두는 식물은 없다]

나무가 훌쩍 자라면 새들을 불러들인다. 나무가 깊어질수록 새들이 숨어 지내기 좋다. 새들은 하루 종일 대화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 같다. 쉴 틈 없이 모이 같은 말들을 쏟아낸다. 새들은 말의 깃털을 뽑아 둥지를 짓는 데 쓰는 것이 아닐까. 새 둥지에 지저귀는 소리가 가득하다.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하는 게 아니라 말들이 알을 깨고 쏟아져 나오는 거라는 상상이 들 정도다.

새를 관찰하면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말은 저토록 많이 모아두면서 먹이를 모아두지는 않는다는 것. 곤충이나 나무 열매가 항상 풍족하지 않을 텐데 사람처럼 비축해 두는 일이 없다. 새는 트렁크가 없다. 그래서 새는 언제든 가볍게 날 수 있고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햇볕을 열심히 모은다고 해가 되지 않듯이, 시간을 열심히 모은다고 오늘이 되지는 않는다. 햇볕을 모아두는 식물은 없다. 나는 사력을 다해 사는 나무를 본 적이 없다. 생명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순환의 과정이라는 것을 저들은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농경족의 습성으로 여름 햇볕을 모아서 겨울에 쓰려고 시도했다. 살을 까맣게 태웠지만 겨울에 체온이 데워지는 효과는 없었다. 이제 새들을 보고 똑똑해진 나는 온기가 있는 말들을 품어서 부화하는 데 주력한다. 햇살 좋은 날 데워진 공기를 마시고 보드라운 햇볕을 쬔다. 따로 목표는 없다.

- 림태주,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中


지금의 고유함이 좋다가도 가끔 찾아오는 여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잠시 권태로움을 느끼는 때가 있다. 아니, 어쩌면 권태로움으로 포장하고 싶은 일종의 불안함일 수도.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않을까.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20대의 내가 만들어 놓은 버릇이다.('습관'은 조금 긍정적인 의미도 있는 것 같아, '버릇'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런 가끔의 순간에 잠시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이미 나의 일을, 나의 몫을 하고 있다. 지금의 이 햇볕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 주어진 볕을 충분히 만끽하면서. 자부하건대, 치열히 살아온 지난날의 결과물로 20대 때보다는 나의 화분은 조금 깊고 넓어졌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하루치의 볕을 쬐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다행이다.


긴 연휴 동안 충분히 데워진 공기를 마시고 보드라운 햇볕을 쬘 것이다.

나 역시, 따로 목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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