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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에 대처하는 어른의 자세

생각의 부유(富裕)에 대한 생각의 부유(浮遊)

by autumn dew

대학교 2학년. 우연한 사고로 병원 진료를 받다 내 심장에 경미한 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심장에서 뻗어나가는 피가 빨리 순환하지 못해서 남들보다 쉽게 어지러움을 느끼고 이내 쓰러지게 된다고 했다. 여자들이 자주 겪는 기립성 저혈압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나는 아주 가끔 정신을 잃어 쓰러지곤 했다. 그러면서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90도로 세운 가벽 같은 곳에 나를 묶어 놓고 입 안에 무슨 약을 뿌리더니, 정상이라면 반응이 없을 것이고 문제가 있으면 반응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쓰디쓴 약을 혀 밑에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점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고 눈을 떠보니 나는 이미 누워있었다. 가벽처럼 보였던 것은 세워 둔 침대였고 이런 용도로 날 묶어두었구나, 그제야 알았다.


당시에 약을 먹고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을 만큼 나았지만, 그 이후로도 갑자기 산소가 부족해지는 공간에 들어가게 되면 종종 어지러움을 느껴 재빨리 그 공간을 빠져나와야 했다. 유난히 사람이 많은 날 성당의 미사 중에도 가장자리가 아니라 중심 쪽에 앉아있게 되면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껴 밖으로 나와야 했다. 목욕탕에 오래 앉아있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습한 날과 사람이 많은 곳에선 가끔 알 수 없는 위기를 느끼곤 한다.



1박 2일간의 짧은 출장 일정동안 줄곧 비가 내렸다. 여름이 다가오니 비가 그치고 난 후, 낮아지는 온도와 별개로 불쾌한 습기가 밀려온다. 출장 기간 동안 사람이 많은 곳에 있진 않았기에 그런 신체적 위기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습기가 많은 날의 외출은 역시 썩 내키지 않는다.


출장 당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했고 비까지 내렸던 탓에 기차역까지 차를 몰고 갔다. 이틀간의 주차는 처음이었고 2만 5천 원이나 되는 주차비를 냈다. 주차비로 2만 5천 원을 쓰다니. 누군가에겐 그 무슨 대수냐 싶겠지만, 나에겐 사치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에게 사치란, 그만한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해낼 수 있는 시간과 대체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이지 않고 굳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 일은 내 기조에 따르면 사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 명이 가는 것도 아니고 혼자 가는 건데. 조금 일찍 나서서 버스를 타도 됐건만, 예측할 수 없는 버스 시간과 노트북까지 들어있는 무거운 백팩을 메고 특히나 비바람과 이 습한 날씨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씻으려는데 습한 날씨 때문인지 수건에서 불쾌한 냄새가 났다. 나름대로 삶아 빠는 효과를 내보겠다고 최근엔 뜨거운 물과 과탄산소다로 수건을 애벌빨래하고 세탁기에 돌렸는데도 냄새가 말끔히 가시지 않은 듯했다. 이제 장마철이 시작되면 더 심해질 텐데 빨래방에 가서 빨아야 하나, 아니면 들통을 사서 삶아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들통이 얼마 정도하나 싶어 쇼핑몰을 검색하다가 대뜸 소량의 빨래를 삶을 수 있는 기계가 눈에 띄었다. 10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 아기를 키우는 집에서 애용하는 듯 보였고 난 혼자 사는 데다 수건 하나 삶는 건데, 그냥 들통을 사서 쓸까 싶다가도 소개 페이지의 화려한 설명과 만족스러워하는 후기들을 보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수당 하나 없는 평달에 건강보험료까지 정산던 잔혹한 4월의 월급 잔고가 생각났지만, 곧 머지않아 채워질 이달의 월급을 생각하며 과감하게 사치를 부렸다. 짧은 시간에 평소답지 않은 사치들.




출장일 아침, 기차역 근처 지하주자창에 주차를 한 뒤 앱로 2만 5천 원의 주차비를 사전결제해야 했다. 처음 쓰는 앱이라 카드 정보를 입력해야 했는데, 어두운 탓에 갖고 있던 실물카드 번호가 잘 보이지 않아 시동이 꺼진 차 안의 내부 등을 켰다. 그렇게 결제를 하고 부랴부랴 차에서 내려 역으로 가 기차를 탔다. 기차에 올라탄 그 순간, 갑자기 차의 내부 등을 안 끄고 내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문을 잠갔으니 알아서 꺼지려나. 아니, 문을 안 잠근 건 아니겠지. 만약에 안 꺼졌으면 어떡하지. 1박 2일 동안 그 상태로 켜져 있으려나. 어릴 때도 가끔 여행을 떠날 때면 방에서 쓰던 고데기나 전자 모기향의 플러그를 뽑아 뒀는지. 이런 것들이 가는 도중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런 찝찝한 생각들은 여행 가는 내내 틈틈이 나를 괴롭혔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 좀 뒤돌아보고 내릴걸. 주차구역을 쉽게 기억해 내려 찍어 둔 주차장의 기둥사진만 남아있었고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출장기간 내내 바쁘고 정신이 없던 탓에 그 생각은 떠오를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출장 일정을 마치고 다시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등은 꺼져 있었고 문도 잠겨있었다. 그래. 이렇게 꼭 생각하면 제대로 돼 있고 아무 생각 없이 돌아왔을 때 제대로 안 해둔 적이 더 많았어,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안도했다.



어릴 때는 생각의 범위가 넓은 데다 그 생각을 심도 있게 할 여유가 있었으나, 어른이 되고 나니 생각의 범위는 좁아졌고 그마저도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어졌다. 어쩌면 인위적으로라도 그런 겨를을 만들기 위해 이런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소하지만 끈적한 생각거리일 법한 소재가 어른의 바쁜 삶에 하찮게 밀려버렸다는 것에 고맙다고 해야 할지, 정말이지 출장 기간 내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바빠서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어른들의 핑계를 그대로 답습했다. 게다가 이틀간 이런 사치라니, 이 또한 어른이 아닌가. 시간과 편의를 돈으로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다. 어른스럽다의 의미를 겉핥기하며 나름대로 이 이틀을 어른스러운 이틀이라 여겼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는 몸에 배어 있는 습기의 취약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평소답지 않은 사치를 부린 걸로 봐야 했다. 끈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산을 쓰고 정류장을 서성이다 버스를 타기 싫어서. 그리고 꿉꿉한 날씨에 꿉꿉한 냄새까지 맡고 싶지 않아서.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사치와 어른스러움으로 포장하고 싶었던 건 아니려나. 어른이 되어 커져버린 몸은 생각하지 않고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 사이의 간격이 좁아졌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나를 에워싼 것들이 습도를 높여 내 생각의 겨를을 좁히고 생각의 슬하에 있던 것들을 조금씩 앗아갔다고 여겼다. 나는 마치 크지 않은 것처럼. 좁아진 간격만큼, 커진 내가 품어야 할 것들은 고려하지 않은 채.




지금 쓰는 세탁세제 중 하나는 뚜껑이 어린이들의 부주의로 함부로 열리지 않게끔 되어 있다. 세제 겉에 뚜껑을 여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지만, 설명을 보고 아무리 따라 해도 뚜껑을 열지 못해 세제를 산 다음 날 세제를 들고 출근해 사무실의 선배에게 열어달라고 한 적이 있다. 나만 못 여는 건가 싶어 후기를 찾아봤지만, 정말 나만 못 여는 건지 그 누구도 그런 후기를 남긴 사람은 없었다. 이런 뚜껑도 못 여는 어른인데, 어른이라 할 수 있나.


그 번거로움을 겪고 싶지 않아서 이후로는 꽉 잠그지 않고 사용하다, 이번엔 같은 세제로 리필용을 샀다. 출장에서 돌아온 날, 출장지에서 입었던 옷을 빨기 위해 리필용 세제를 열어야 했다. 리필용 세제의 뚜껑은 크기도 작고 쉽게 열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리필용 세제의 뚜껑도 역시나 어린이들이 함부로 열 수 없게끔 돼있었고 어이없게도 이번에도 한참을 홀로 씨름을 했다. (끝내 열긴 했다.) 참나, 이런 뚜껑도 제대로 못 여는 어른이라니. 어른스러운 이틀을 어른스럽게 마무리하지 못했다.



마침내 습기가 걷힌 주말 아침, 지난밤 빨아 둔 빨래의 건조대를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옮겨두고 다음 주의 출장지로 향하기 위해 다시 짐을 꾸린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자리에 앉아 생각할 겨를을 갖는다. 몸이 커진 어른으로서 좁아진 주변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제대로 고려해야 할 것들과 깊게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다. 나에게 해롭기 그지없는 삶의 습기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시간과 편의를 돈으로 해결하는 것도 좋지만 시간과 편의 대한 사유를 아두는 것 더욱 어른스러운 어른이 아니려나. 그러니 그 어떤 사치보다 이 시간이 가장 가치 있는 사치이니, 세제의 뚜껑 하나도 제대로 못 여는 이 어른이는 언제 불쑥 찾아올지 모를 일상의 장마를 틈틈이 대비해야 한다.



드디어 빨래 삶는 기계가 배송되었고, 지난밤 함께 빨지 못했던 수건을 삶으며 습기의 흔적들을 뜨겁게 지졌다. 곧 찾아 올 장마철, 수건에 엉켜 붙는 습기와는 앞으로 이렇게 작별하면 될 테지만, 가치 판단이 뒤엉킨 끈적한 생각들은 어떻게 달라붙을지 모를 일이다. 어른스럽게 대처하고 싶다. 쓸데없는 것들에 유착되지 않고 말끔한 생각만 남겨둘 제습제를 많이 가진 어른이야말로 진정한 부자일지도 모른다. 가치 있는 시간과 여유는 그 제습제로 향유할 수 있는 걸지도.


어른스럽게, 가치 있는 모양으로 사치 부리는 방법을 수집하고 그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한다. 습기에 잠식 돼 부지불식간에 쓰러지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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