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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

서운해 말아요

by autumn dew

누군가가 자신의 지인인 누군가에게 자신을 힘들게 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억울함과 분함은 험담의 형태로 전해진다. 분하다는 그의 말에 그 누군가는 "네가 그만큼 화나는 게 당연하지.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해준다. 노여움을 인정받은 것만 같다. 그러면서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의 편이라 생각하는 그 누군가가 온전히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렇게 그 누군가는 자신을 분하게 한 이의 이야기를 상대에게 더 열심히 늘어놓는다. 그러나 한동안 이야기를 듣던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제는 다른 편이 된 것마냥 다시 말한다. "그 사람도 그럴 수 있겠네."


그럴 수 있다는 말처럼 위로가 되면서 동시에 서운해지는 말이 있을까. 나 역시 그 말이 위로가 된 적도, 반대로 서운할 때도, 어떨 땐 상처가 된 적도 있다. 나를 염두에 두고 건네는 '그럴 수 있지.'와 내가 미워하는 자를 염두에 두고 내뱉는 '그럴 수 있지.'는 같은 말인데도 늘 느낌이 달랐다. 한없이 위로를 받다가도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때엔, 상대가 아무 말하지 않고 들어주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더 애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화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 같다가도 어떨 땐 불을 더 타오르게 하는 부채질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말.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에 '그럴 수 있지.'란 말을 삼가려 노력한다. '그랬구나.', '그렇군요.'와 같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추임새는 넣되, 그럴 수 있을 거란 가정 섞인 말은 가급적 쓰지 않으려 한다.




작년 여름, 기숙사에 머물며 한가로운 주말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ott를 통해 <고물상 미란이>라는 단막극을 보았다.


한적한 시골에 사는 억척스러운 고물상 주인, 미란. 어느 날 그녀에게 그림을 그리다 성공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진구라는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자신이 버린 그림을 고물상에 가져다 놓은 미란에게 흥미를 느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다. 어느 날, 미란의 고물상에 누군가 강아지를 버리고 가는데, 미란과 진구는 강아지의 주인을 찾으려 한다. 그러던 도중, 미란은 어린 시절 자신을 보육원에 맡기고 떠나 버린 아버지가 홀로 돌아가셨다며 그의 시신을 인도해 가라는 연락을 받는다. 숨겨 두고 지냈던 슬픔과 미움이 밀려온 그녀. 갑자기 다시금 누군가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지게 된 미란은 진구에게 거리를 둔다.


진구는 우연히 강아지의 주인을 찾게 되어 미란을 찾아가고 둘은 강아지 주인인 어느 소년을 만난다. 강아지를 가져가라는 미란의 말에 소년은 꿈쩍하지 않는다. 누나가 키워주면 안 되냐며 큰소리로 미란에게 강아지를 떠넘기는 소년. 알고 보니 그의 아버지는 개농장을 하고 있었고, 소년은 불쌍한 강아지의 행복을 위해 강아지를 버린 거라고 미란에게 말한다. 행복하라고 버린 건데, 왜 버리면 안 되냐 울부짖으며.


그제야 미란은 자신을 보육원에 맡기고 떠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다. 너무 아껴서 버릴 수도 있구나.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함께인 불행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 강아지를 버린 소년. 소년의 모습을 통해 미란은 한 번도 자신을 찾으러 보육원에 오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사실 알고 있었다. 딸을 보육원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처지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그저 자신을 버리고 간 것에 대해 원망만 하고 싶었다고 진구에게 말한다. 그렇게 미란은 진구와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인도받으러 경찰서로 향한다.



버려졌다는 슬픔과 버린 이에 대한 원망. 이 원망을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로 달래줄 수 있을까.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주인공을 '그럴 수 있다'라고 납득시키는 전개에, 놀라움과 동시에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소년의 그럴 수밖에 없던 마음이 미란에게 전해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는 '어쩌면 그럴 수 있어.'가 된다. 그래서 더더욱 '그럴 수 있지'란 말은 삼가게 되었다.


다시 첫 문단으로 돌아가자면, 나는 예시에 등장하는 모두를 누군가라고 써두었다. 모두가 어떤 상황에 어떤 마음으로 놓이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고보면 이토록 '그럴 수 있다'는 한마디 말에, 쉽게 위로받고 쉽게 부서지는 것은 모두가 외로워서가 아닐까.



출장으로 떠나 오랜만에 마주한 동해 바다. 잔잔한 서해만 보다 오랜만에 파도가 철썩이는 동해를 보니 마음이 시원한 듯 쓸쓸했다. 일을 끝마치고 바다를 걸으며, 모든 것을 감싸주는 파도가 너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가도 차갑게 부서지며 너를 둘러싼 그 상황들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모두가 그럴 수 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내 편인 듯 내 편 같지 않은 말. 나 또한 그 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그의 편이면서 그의 편이 아닌 것처럼 만들 수 있다. 애초에 그럴 수 없는 일이란 없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없었다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모두 외로웠다 함께였다를 반복한다. 이제 이 말을 통해 배운 것은, 위로도 서운함도 아닌, '수용'이다.




감사를 다니며, 열심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나게로부터 '그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이들과 자주 마주한다. 그 말의 위력을 아는 나는 쉽게 그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내가 어느 편에 서서 그럴 수 있다고 말해야 할지는 모를 일이.


그렇게 이번에도 내 할 말만 하고 돌아온 나는 그들이 서운해할까 싶어 여기에 이렇게 변명을 남겨둔다. 나의 그럴 수밖에 없음과 그럴 수 있음을 수용해 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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