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지금, 해독은 나중에
역마의 5월.
시시각각 바뀌는 장소의 변화와 함께 시간도 훌쩍 바뀌어버렸다. 출장지도 전국적인 데다 주말에도 아끼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을 놓칠 수 없다 보니 더더욱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다녀왔다. 그렇게 훌쩍 지나가버린 시간. 5월 한 달은 외지인으로 살다 외지인으로 끝난 느낌이다. 전국을 돌며 일하는 프리랜서들은 도대체 어떤 체력과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는 걸까. 출장 중에 오랜만에 통화하게 된 친구는, 내 스케줄을 듣더니 네가 무슨 대선 후보라도 되냐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사무실의 캘린더에는 점으로 찍어둔 할 일보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직선으로 연결된 출장지와 목적만이 나열돼 있고 달력을 보면서 그곳에 있던 나를 떠올린다. 여기선 이랬었고, 저기선 저랬었지. 그리고 이내 넘길 다음 달력을 보고 한숨이 나온다. 벌써 6월. 한 해의 절반. 정신없이 바쁜 사람은 시간을 쪼개어 쪼개어 쓴다고 쓰는데 모순적이게도 그런 사람에게 시간은 더 빨리 흘러간다.
피곤에 절여진 한 달의 끝. 여기저기를 다니느라 못 잤던 잠이 이제야 밀려오는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는 일이 힘들었다. 퇴근 후에 저녁을 먹고 청소나 빨래를 하고 침대에 누워 책을 좀 읽으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은 수없이 이불 위에 떨어졌고, 아직 자기엔 이른 시간이라 여기는 시간대에도 졸음을 참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감사실에 오고 출장이 잦아지고부터는 수면에 어려움이 생겨 낮에 마시는 커피도 디카페인을 마셨다. 그렇게까지 노력했음에도 밖에선 좀처럼 깊은 잠에 들기가 어려웠는데, 한 달 새 그렇게 모아둔 잠이 월말인 이제야 밀려오는 건지 날씨가 선선한 밤공기를 누릴 겨를이 없이 매일 밤 잠에 빠져들곤 했다.
한창 여행을 다니던 때에 10시간이 넘는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해 한 시가 아까운 마음에 숙소에 들어가 대충 씻고 나와 관광지를 갔던 적이 있었다. 젊으니까 괜찮을 거야, 시간이 아까우니 하나라도 더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입구에 들어섰다가 얼마 되지 않아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근처 카페에서 엎드려 쪽잠을 잤다. 서 있는데도 졸리다는 느낌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다 아무리 낮이라도 타지인데 위험하니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부랴부랴 다시 숙소로 향해 일찍 잠에 들었다. 그런 시차적응처럼 지금의 이 피로 또한 다른 의미의 시차적응일까. 그렇게 여행기간 동안 시차적응과 함께 그날 하루의 피로도 함께 덮쳐 밤마다 정신없이 잠에 들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그곳의 생리에 익숙해져 갈 무렵,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이어진 선들이 다시금 끊기고 새로운 선이 시작되면 다시금 적응기를 갖는다. 그때와 비슷한 듯 하지만, 그때보다 주기가 짧고 잦아졌다고 생각하면 좀 나으려나. 또 다른 의미의 시차적응.
감사실에 온 후로, 단 한 달만이라도 매일 같은 곳에서 잠들어봤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누가 들으면 평범한 직장인에게 그 당연한 일이 어렵단 말인가,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다지도 당연한 일이 나의 바람이 될 줄은 몰랐다. 줄어든 선의 간격과 그만큼 늘어난 매 적응의 시간. 점이었다 선이었다 끊기는 모양이 멀리서 보면 모스부호처럼 보일 듯한데, 언젠가 이 암호가 남겨놓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언젠가 지금의 바람대로 매일 같은 곳에서 잠들다 보면 또다시 무난한 선보다는 띄엄띄엄 점을 찍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겠지. 단조로운 선의 세상에선 해독할만한 모스부호가 없을 테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이토록 간사하고 얄궂은 것이다.
짧지만 이내 다시금 시작되는 매 순간의 선을 점처럼 체감하도록 애써본다. 그렇게 촘촘히 이어진 점이 나의 바람처럼,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기다란 선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순간을 점처럼 하나하나 헤아리며 넘겨도 이렇게나 빨리 지나가버리는 시간이니.
한 해의 절반을 완성할 마지막 달이다. 이렇게 물살에 휩쓸리듯 월말을 맞이할 순 없으니, 한 해의 절반에 어떤 반점을 찍을 것인지 계획한다. 멀리서 보았을 때 어떤 모양의 모스부호가 남을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집중해야 할 것은 해독할만한 가치가 있는 기록과 기억을 남기는 것. 지금 남겨지고 있는 이 생의 모양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대충, 어름어름, 흐지부지 기록을 남겨둘 순 없다.
가치 있는 기록이 되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 오늘 또한 점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느 선의 일부인지 알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