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직장인의 항상성(恒常性)
한 달 만에 본가로 내려왔다. 연휴를 앞두고 기차를 일찍 예매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자주 타고 다녔던 시간대의 기차는 모두 매진이었다. 결국 앞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가 한참이나 이른 시간대의 기차를 예매할 수밖에 없었고, 본의 아니게 대구에 일찍 도착할 것 같았다. 문득 대구로 내려오게 되면 꼭 밥 한 끼 하자던 이전 근무지의 동료들이 떠올라 일찌감치 연락을 건넸다. 시간이 되냐는 나의 조심스러운 물음과 동시에 어디서 만나 무얼 먹을지를 재빨리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이 괜스레 고마웠다.
역시나 대구는 훨씬 더 여름다운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고,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엄마와 짧은 수다를 나눈 뒤 예정된 약속에 나갔고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늦은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짧은 연휴지만 시간을 쪼개고 쪼개 아끼는 사람들을 고루 만났다. 한 달 만에 내려온 것이 무색하게 어느덧 금방 익숙해져 버린 고향의 온도.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는 비단 기온뿐이 아니었다. 여기엔 나를 환영하고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뜻하다 못해 덥다.
그러고 보니, 6월엔 그동안의 바쁜 일정에 뒤쳐져 만나지 못했던 이들과의 약속이 조금 예정돼 있었다. 상반기를 아무 계획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하다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던 나의 바람을 알아챈 건지 얼굴을 오래 보지 못한 사람들과 만나는 오랜만의 약속들이 대체로 쉽게 이루어졌다. 옅어진 관계들에 다시 색을 입힐 수 있는 시간들이 틈틈이 생겨난 것 같아 다행이다.
이런 만남들이 더욱 반갑게 느껴진 것엔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감사실에 온 뒤,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주어진 일에 몰입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끔씩 내가 맡았던 지난 일들에 대한 컴플레인들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특히나 최근엔 내가 처리했던 일로 인해, 누군가 나에게 단도직입적인 불만을 표시해 왔다. 아무런 인사도 없이 갑작스레 나의 직위를 호명하며 전해진 톡에, 나는 할 말이 없어 그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나서 상대방에게 돌아온 첫마디는 '안녕 못합니다.'
나 때문에 안녕하지 못하다는 뉘앙스였다. 어떤 연유로 연락했는지 바로 짐작이 되었고 답변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그는 서운함과 서러움을 가득 담아 연이어 톡을 보냈다. 내 마음이 이런데, 너는 어쩜 이렇게 나를 함부로 판단했냐는 식으로. 감정 섞인 말에 감정 섞인 말로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를 납득시킬 만한 이야기를 건네기 위해 근거를 보충하고 문장을 다듬어 그에게 전달했고, 고심해서 보낸 답변에 그는 더 이상의 톡을 보내지 않았다. 크나큰 감정의 요동 없이, 거기서 그날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날 퇴근길에 다시금 떠오른 생각. 아, 그러고 보니 내가 하는 일은 대체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토록 나를 원망할 수 있는 일이었구나.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다.
'안녕'이란 단어를 참 애정한다. 단순히 만나서 건네는 인사 한 마디지만, 상대의 평안을 묻는 다정한 말. 늘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에 그런 답변을 예상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의 답변은 적잖이 당황스럽다. 그렇게 환영받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 싶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나를 만나겠다고 기꺼이 시간을 내고 따뜻하게 맞아주니, 그들과의 시간이 더욱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한 그에게 내심 미안할 만큼, 너무나 안녕한 시간을 보내버렸다.
모두에게 건네는 사소한 인사말에, 모두가 다정하게 답할 순 없는 일. 내가 하는 일의 여파가 상대의 불쾌에까지 책임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러나 안녕하지 못하다는 그의 말에, 나의 안녕까지 요동칠 순 없다. 나는 그의 직장에서의 책임에 대한 책임만 물을 뿐, 그의 불쾌에 책임을 질 수 없고 그 또한 나의 불쾌에는 책임이 없다. 그러니 나는 늘 하던 대로, 애를 쓰더라도 다시금 안녕할 수밖에. 그의 말 한마디로 내가 아끼던 단어의 색을 바래게 하고 싶지 않다.
고온에 충전되어 다음 출장지로 길을 나선다. 할 일을 한다고 한 것뿐인데, 언젠가 지금처럼 또 누군가 찬물을 끼얹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안녕을 물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안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원래의 온도를 되찾을 것이다. 앞으로도 굳건히 안녕해야, 지금의 일을 이어나갈 수 있을 테니.
'안녕'은 나에게 고온도 저온도 아닌 항상성에 기반한 가장 평온한 상태의 온도임을 깨닫는다. 내 항상성에 흔들림이 없는지, 가끔 이런 시험의 시간이 들이닥친다. 이번에는 다행히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빨리 회복했으나, 혹 이런 도움이 없더라도 재빨리 원래의 온도로 돌아와야 한다. 안녕한 상태로.
그러니 비록 선생님은 안녕 못하시더라도.
다소 죄송스럽게도 다시 제 할 일을 찾아 떠나야 하는 저는, 지금껏 그래왔듯 좀 안녕할게요. 그리고 가급적 선생님도 빨리 안녕하시길 바랍니다.